[ 시(詩)가 있는 아침 ] - '담쟁이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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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마종기(1939~ ) '담쟁이꽃' 부분

내가 그대를 죄 속에서 만나고
죄 속으로 이제 돌아가느니
아무리 말이 없어도 꽃은
깊은 고통 속에서 피어난다
(중략)
따뜻하구나, 보지도 못하는 그대의 눈
누가 언제 나는 살고 싶다며
새 가지에 새순을 펼쳐내던가
무진한 꽃 만들어 장식하던가
또 몸풀 듯 꽃잎 다 날리고
헐벗은 몸으로 작은 열매를 키우던가
누구에겐가 밀려가며 사는 것도
눈물겨운 우리의 내력이다
나와 그대의 숨어 있는 뒷일도
꽃잎 타고 가는 저 생애의 내력이다



어제 잘못 간 길을 지우려는 듯 담쟁이는 제 묵은 가지를 휘감고 뻗어간다. 마른 가지 위로 또 하나의 길을 내며 잎사귀를 드리우고, 잎사귀 아래 도둑질처럼 꽃을 피운다. 허공을 향해 흔들리는 촉수는 누군가를 간절히 부르는 듯하지만, 휘감을 것은 제 몸밖에 없다는 듯 다시 돌아오는 담쟁이. 제 꽃잎을 타고서라도 뻗어가며, 밀려가며, 담을 넘는다.

나희덕<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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