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주변 발굴해보니 19세기 풍경 눈에 선하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2면

조선시대 서울의 남쪽 관문이었던 숭례문. 서울에 처음 발을 내디딘 당시 백성들은 어떤 길을 걷고, 어떤 풍경을 보았을까. 국립문화재연구소 고고연구실 신희권 연구관은 “당시 서울에 닿은 백성들은 숭례문을 통과해 지금의 서울역에서 도심 방향으로 뻗어 있는 잘 포장된 길을 따라 걸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는 복원 공사에 앞서 벌인 숭례문 안 외부 지역 발굴 조사 결과를 25일 오후 2시 숭례문 현장에서 발표했다. 신 연구관이 지적한 포장된 길은 현재의 지표면에서 30~60㎝ 아래에서 발굴됐다. 조선 후기부터 대한제국 말기까지 사용된 도로 흔적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일제강점기에 걸쳐 진행된 각종 공사로 땅 밑에 묻혀 있던 조선시대 도로가 마침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 도로는 갈색 사질토를 6~8차례(약 130~140㎝) 쌓아 바닥을 다진 뒤 그 위에 박석(薄石·지금의 보도블록 역할을 하는 얇고 넓적한 돌)을 덮어 노면을 포장하는 정교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도로 폭의 경우 숭례문 바깥쪽(서울역 방향)은 25m, 안쪽은(도심 방향) 26m에 달한다. 숭례문을 통과하는 도로 중앙부에서는 박석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1899년 일제가 전차 선로를 가설하면서 제거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에 훼손된 숭례문 동·서쪽 성벽의 기초 부분도 확인돼 성곽 복원 작업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번 발굴조사에서는 민가 터 3동을 비롯해 구들 시설, 배수 시설 등 과거 숭례문 근처에 즐비했던 민가의 흔적도 함께 발견됐다. 신 연구관은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숭례문을 통해 서울에 들어선 사람은 도로를 중심으로 좌우에 빽빽하게 자리 잡은 수백 채의 민가와 마주치게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숭례문 내부 북서편 지하 3m 지점에서는 조선 전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확인됐다.

연구소 측은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조선 후기 숭례문 주변 도로면의 높이와 당시 축조기법, 일제에 의해 훼손된 성곽의 형태를 확인했다. 향후 숭례문과 그 주변 지형 복원을 위한 소중한 고증 자료를 확보한 것”이라고 말했다.

글=이에스더 기자, 사진=문화재청

[J-HOT]

▶ '盧의 청와대' 행정관, 세종서 건넨 30억 관리

▶ 배에 관 꽂은 김 추기경 입에선 '순교자찬가'가

▶ 美 경제학계 '3대 천재'로 불리던 그가…

▶ 친자매 동시 사시 합격, 아버지 알고 보니 아하!

▶ 고물상의 허망한 일장춘몽…"한달 300 매출→10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