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재 기자의 웰컴 투 풋 볼 <58> 승부 조작에 썩어가는‘풀뿌리’ K-3 축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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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축구 경기에서 승부 조작은 이탈리아나 중국 같은 곳에서나 나오는 얘기인 줄 알았다.

그러나 지난 주말, 축구팬은 국내 축구에도 독버섯처럼 퍼져 들어온 승부 조작의 음험한 그림자를 보았다. 경찰은 중국 도박업자로부터 돈을 받고 승부 조작에 가담한 혐의로 아마추어 리그인 K-3 소속 축구선수 이모씨를 최근 구속했고, 같은 혐의로 팀 동료 4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승부 조작에 관여한 대가로 한 번 할 때마다 100만∼250만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패스 미스를 남발하거나 수비를 느슨하게 해 0-7로 대패하기도 했다.

경찰 발표를 보면서 사람들은 두 가지 사실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한다. 첫째는 ‘순수 아마추어 리그인 K-3 경기에도 해외 도박꾼들이 베팅을 하는가’다. 물론이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경기를 벌이는 리그’라면 수준이나 지역을 가리지 않고 판을 벌인다. 국내 축구 전문가와 관련 사이트를 통해 정보를 얻는 이들이 K-리그에서 가장 이상하게 생각하는 팀은 ‘Gwangju Sangmu(광주 상무)’다. “왜 이 팀에만 외국인 선수가 없고, 선수들의 헤어 스타일이 똑같은가”라는 질문을 많이 한다. 군 팀이라는 특수성을 모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승부 조작에 가담한 선수들이 얼마나 가난하기에 단돈 100만원에 자신의 양심과 자존심을 팔았는가 하는 점이다. 이 질문은 한국 축구의 부끄러운 자화상과 맞닿아 있다. 이번에 중국 도박업자에게 포섭당한 선수들이 뛰는 K-3는 순수 아마추어 전국리그를 표방해 지난해 출범했다. 선수들은 대부분 프로·실업·대학 등에서 뛰다가 은퇴했거나 퇴출당한 사람이다. 이들은 축구교실 코치, 보험 외판원, 병원 구급차 기사 등 다양한 직종에서 힘들게 일하면서도 축구를 향한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선수들은 경기당 10만원 정도의 출전수당을 받을 뿐이지만 최근 경기침체로 이마저도 몇 달씩 밀린 구단이 있다고 한다. 생계가 불안정하고 미래도 불투명하다 보니 손쉽게 유혹의 검은 손을 덥석 잡아버린 것이다.

이번 사건에 대해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쪽은 K-3와 내셔널리그를 관장하는 대한축구협회다. 축구협회 75년 역사상 초유의 조직적인 승부 조작 사건이 터졌다. 협회는 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파악하고, 관련자를 엄중 징계하는 한편 재발 방지책을 내놔야 한다.

축구협회는 ‘풀뿌리 축구의 확산’이라는 명분 아래 최근 2년 새 내셔널리그와 K-3 참가 팀을 10개 이상 늘렸다. 이 과정에서 최소한의 운영 시스템과 자금을 마련하지 못한 팀도 리그 참가를 승인했다. 이제는 옥석을 가려야 할 때다. ‘부실 축구단’을 과감히 잘라내지 않는다면 이 땅의 풀뿌리 축구는 뿌리부터 썩어갈 것이다.

정영재 기자·축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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