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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너무 멀리 왔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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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그러나 웬걸, 하루아침에 기온이 곤두박질치더니 지난 며칠은 영하 5도, 영하 7도까지 떨어졌다. 바람은 또 얼마나 세던지 단단하게 매달려 있던 가로수 은행잎들도 죄다 떨어졌다. 땅에 떨어진 이파리들 중엔 채 노랗게 물들지 못한 것들도 많이 보였다. 꽃처럼 여리거나 예쁘지는 않아도, 채 피지도 못하고 떨어진 신세가 가엾은 건 마찬가지. 아직 초록의 은행잎들이 문득 애처로웠다.

그런데 급전직하한 기온도, 무섭게 불던 바람도 어제, 오늘은 사뭇 다르다. 급작스럽게 찾아온 추위라 가는 것도 급작스러운가. 날씨도 참 뒤끝 없다는 생각을 하고는 혼자 실소를 했다.

맞다. 사람들 중에도 뒤끝 없는 이가 있다. 뒤끝이란 ‘좋지 않은 감정이 있은 다음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감정’이라고 국어 사전에 나와 있고, 우리 사회에서 ‘뒤끝 없다’는 성향은 ‘좋지 않은 감정이 생겼더라도 그것을 금방 극복하고 마음에 응어리를 남기지 않는’ 미덕으로 간주된다. 그러니 인물평으로는 꽤나 긍정적이어서, 괜찮은 사람이라는 뜻을 내포한다.

특히나 남자가 뒤끝 없다는 평을 듣는다면, 가끔 성질은 부리지만 오래가지는 않고 꽁하지 않은, 사나이다운 대범한 남자로 통한다.

그런데 나는 왜 실소하는가. 뒤끝 없는 사람들은 대체로 감정을 자제하지 않고, 거르지 않고, 죄다 쏟아내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한 번 낸 화를 오래 끌지 않는 만큼, 화를 내는 것도 난데없기 십상이다. 이번의 추위가 급작스레 왔다가 급작스레 간 것처럼 그렇게 열을 내고 그렇게 식어 버린다.

그런데 그건 참으로 당연한 거다. 상대방이야 어쨌든 불편한 감정을 누르지 않고 다 토해낸 마당에, 뭐 남은 게 있어 오래간단 말인가. 그러니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게 당연하다. 쩨쩨하지 않거나 사나이다워서가 아닌 거다. 당연한 것이 괜찮은 일이 되는 시류는 실소할 만하다.

꽤 오랜 시간 우리 문화에서 감정은, 밖으로 드러내기보다 안으로 삭이는 것이었다. 그것이 우리의 방식이었다. 너무도 오래 그렇게 살아와 거꾸로 가보는 것일까. 요즘의 우리들은 발산에만 열중한다. 모든 걸 내보이고 드러내고 토해낸다. 삭이거나 마음에 두면 스트레스가 되니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남김 없이 발산하는 것이 좋다며 서로를 격려한다.

그러나 나는 좀 저항하고 싶다. 한참 생각해서 쓴 글도 다시 읽어 보면 부족한 대목이 보이는데, 말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참지 않고 쏟아낸 말에는 실언이 있게 마련이고 후회가 따른다. 그러므로 감정이 일어나는 대로 쏟아내지 않고, 삭이고 거르며 반추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구식 소리를 듣더라도 말이다.

서울 용산 국립박물관 3층의 한 독방에는 국보 제83호 금동 미륵반가사유상이 모셔져 있다. "아,” 라는 탄식 외에는 그 어떤 수식도 군더더기가 될 만큼 불상은 지고의 아름다움 그 자체다. 속세에 길들여진 눈에도 그 아름다움은 다른 세상의 것으로 보이는데, 장르는 달라도 고려청자나 이조백자 역시 그러하다고 느낀다.

한데 이런 아름다움은 결코 드러내고 쏟아내서 얻어진 것이 아닌 것 같다. 이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 말할 능력이 내겐 없지만 거칠게라도 표현해 본다면, 껍질이라 여겨지는 것들을 오래오래 되삭이고 걸러낸 뒤에 비로소 도달한 정수(精髓)가 아닐까 한다. 우리 조상들이 노닐던 사유의 세계는 바로 이런 것이었고, 이런 정신세계 안에서 그토록 아름다운 불상도, 도자기도 만들어질 수 있었던 거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세계로부터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드는 거였다. 침잠하고 삭이고 덜어내는 대신, 드러내고 토해내고 발산하느라 우리 문화의 정수를 놓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였다. 뒤끝 없음이나 칭송하는 사이에 말이다. 그러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게 아닌가 문득 두려워지는 거였다.

최인아 제일기획 제작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