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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협 10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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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08년 11월 15일, 조선인 의사 36명이 한성에 모였다. 지난 주말 100주년을 맞은 의사협회의 뿌리인 의사(醫事)연구회를 창립하기 위한 자리였다. 일본 자혜의학교에 유학해 양의학을 배우고 귀국한 뒤 관립의학교 교관을 지냈던 김익남(회장)·안상호(부회장)와 관립의학교 졸업생이 주축이었다.

순수 국내파 양의사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02년이다. 그해 관립의학교 1회 졸업생 28명이 배출됐다. 당시 양의사는 귀한 직업은 아니었다. 피를 보고 수술칼을 잡아야 하는 서양 의술이 양반이 하기엔 부적합한 것으로 비친 탓이다. 주로 중인들이 지원했고 백정의 아들도 있었다.

국내에서 처음 면허를 받은 양의사는 1908년 첫 졸업생을 낸 세브란스의학교 출신 7명이다. 이들은 실습 위주의 도제식 교육을 받았다. 교육 기간도 7∼8년이나 됐다. 이들에겐 면허와 함께 의료 독점권이 주어졌다. 서양에서 이 특권이 유사 직종과의 치열한 투쟁을 통해 얻어진 것과는 달랐다. 국내 의사가 직업윤리를 제대로 확립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은 이러한 특권 때문이라는 학자도 있다.

1910년 한일합병과 함께 의사연구회는 강제 해산된다. 5년 뒤 다시 세운 게 한성의사회다. 이 의사회는 1927년 함남 영흥에서 발생한 ‘에메친’ 사건을 해결하면서 단숨에 유명해졌다. 일본인 의사가 폐디스토마를 치료한다며 환자의 나이·상태 등을 고려하지 않고 에메친을 주사해 6명이 숨지고 50명이 앓아 누웠다. 의사회는 조사단을 현지에 파견해 역학조사에 들어갔다. 명백한 의료사고라고 결론짓고 총독부를 압박했다.

해방이 되자 건국의사회·조선의사회·조선의학협회·대한의학협회·대한의사협회(의협) 등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한성의사회의 바통을 이어 받았다. 의학교육도 연구 중심인 독일식에서 진료 중심인 미국식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전문의 제도가 활성화됐다. 의사의 사회적·경제적 지위도 더 높아졌다.

지금도 의사는 선망의 대상이다. 질적·양적으로 1세기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성장했다. 해방 직후인 1949년엔 일본·만주 등지에서 돌아온 의사를 통틀어 4300여 명에 불과했으나 지난해엔 9만1000여 명에 달했다. 의료기술도 이미 세계 수준이다. 이제는 이너서클을 만들어 스스로를 고립시키기 보다는 대중과 함께 어깨동무할 때다. 의협의 100세 생일을 축하한다.

박태균 식품의약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