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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가 걱정스러운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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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수출 하나로 근근이 버텨 오던 우리 경제가 급등한 유가 때문에 휘청대고 있다. 지난 3년간 꾸준히 상승해온 유가이기에 걸프전 때와 달리 이번에는 단기간에 하락할 것 같지 않다. 그러나 경제가 어렵다고 개혁을 늦출 수 없다는 것이 청와대의 입장이다. 조급한 문제 해결보다 혁신을 통해 장기 성장력을 높여야 한다는 뜻이다. 당연한 원칙이나 우리 사회를 주도하고 있는 개혁 내용을 보면 무언가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 파병 등 국제적 관점서 봐야

첫째, 개혁.분배.형평을 강조하는 주장을 보면 대부분 국내 문제로 시야가 한정돼 국제감각이 부족하다. 행정수도 이전이 좋은 예다. 과밀한 수도권, 서울~지방의 소득격차 해소만을 문제삼으면 수도를 지방으로 옮겨야 한다. 그러나 보다 넓은 시야에서 바라보면 서울~인천~경기를 연결하는 대규모 산업벨트 육성이 국제 경쟁력 제고에 효과적일 수 있다. 지역 균형발전이 중요해도 지역 간 기업유치 경쟁을 통해 상향 평준화를 유도해야지 특정지역의 발전을 막는 식이 돼서는 안 된다. 경제의 장기 성장동력이 제고될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이라크 파병문제도 마찬가지다. 민족 자존심과 침략의 비도덕성을 고려하면 파병이 철회돼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병을 주장하는 까닭은 그렇지 않았을 때 발생할 한.미 간 갈등의 부정적 효과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주한미군 감축은 그 개연성만 가지고도 경제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감축에 따른 국방비 증가, 국가 신용등급 하락에 따른 해외 차입비용 증가는 누가 부담할 것인가. 부시가 재선에 실패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란 일부 주장은 순진무구한 수준을 넘어 무책임하기까지 하다. 민주당이 선거에서 이기면 부시를 도와주지 않아 고맙다고 할 것 같은가. 민족 자존심과 실리 사이에서 이념 논쟁을 하는 사이에 파병하고도 고맙다는 소리를 듣기 어렵게 됐다.

둘째, 개혁에 대한 주장은 과거 청산에 매달리다 보니 미래에 대한 청사진 제시가 부족하다. 과거 돈.권력.학벌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적 책임은 도외시한 채 자신의 이익만 챙겨 왔기 때문에 한바탕 한풀이가 불가피한 상황이 초래됐다.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의 비자금 코미디와 재벌의 편법 상속을 본 국민이 과격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부수는 일과 새 것을 창조하는 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지금 우리 사회를 주도하고 있는 개혁방향은 과거 청산에 집착하고 있을 뿐 새로 건설해야 할 미래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600대 기업의 투자계획 중 30대 기업의 비중이 80%를 넘는 현실에서 대기업을 해체한다면 투자를 활성화할 방법이 무엇인가. 사교육비를 줄이기 위해 대학을 평준화하면 국제 경쟁력을 갖춘 인재는 어떻게 양성해야 하나. 부자를 죄인시하는 부유세를 도입하면 빌 게이츠와 같은 기업가가 나타나겠는가. 못된 부자를 응징하는 수준을 넘어 존경할 만한 부자를 육성하는 것을 정책 목표로 삼는다면 부유세 도입보다 상속세와 재산세 강화가 더 바람직한 정책이다.

호들갑 떨지 말고 조금만 기다리면 개혁의 성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기다리지 못하고 조바심 내는 까닭은 필자의 경제상식으론 미래에 대한 청사진없이 분배와 개혁을 주장한 정책치고 성공한 예가 없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이 좋은 사례며 브라질의 룰라 정부가 보수적인 경제정책을 채택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 미래 청사진 없는 개혁은 실패

경기가 나빠질수록 분배와 형평에 대한 요구는 거세지게 마련이다. 그럴수록 경제를 살리려면 기업이 원하는 지역에 마음대로 투자할 수 있게 하고, 비평준화 명문고를 설립해 기러기 아빠의 송금액이 국내에서 돌게 하며, 논밭에 골프장을 지어 동남아가 아닌 지방 곳곳에 관광객을 유치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선 돈.권력.학벌 있는 사람이 이런 주장을 하면 오해받기 십상이다. 과거의 때가 묻지 않아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 집권 여당이 과거 청산을 넘어 미래지향적 개혁을 추진할 때 경제의 재도약이 가능해질 것이다.

이창용 서울대 교수 경제학 한국채권연구원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