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강국 일본이 찍은 물리학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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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재일동포 물리학자가 초전도 물질의 결정구조를 규명, 고온에서 실용화할 수 있는 신소재 개발을 주도하고 있다. 초전도체는 전기 저항을 받지 않기 때문에 먼 곳으로 보내는 전력의 손실을 줄일 수 있는 꿈의 소재다.

주인공은 올 8월 일본물리학회지(JPSJ)에 연구논문을 발표한 산업기술종합연구소(AIST) 에너지기술연구부문 이철호(39·사진)박사다. 기초과학 분야에서 13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일본에서 한국 국적의 과학자가 주목 받는 것은 이례적이다.

도쿄 인근 쓰쿠바(筑波)에 있는 일본 최대 물리학 연구기관인 AIST 연구실에서 최근 이 박사를 만났다. 그는 “1986년 발견된 동산화물 고온초전도체가 현재 최첨단 초전도체”라며 “내 연구 성과는 고온에서 활성화할 수 있는 결정구조를 찾아낸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세계 물리학계의 초전도체 연구는 답보 상태였다. 이 때문에 이 박사의 업적은 새로운 초전도체 발견이라는 물리학계의 오랜 과제를 풀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그러나 아직 제품 개발로 이어지려면 갈 길이 멀다는 게 이 박사의 평가다. 그는 “신소재가 제품화되면 고전압 송전을 위해 도심에서 지하 30m까지 전선 케이블을 묻을 필요가 없고 지하 2m까지만 매설해도 송전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현재 쓰고 있는 전선 케이블은 송전 도중 400km당 1만KW(10만 세대 사용분)의 전력을 낭비한다.

전력 손실을 크게 감축할 수 있는 새로운 초전도체 개발을 위해 일본은 독일 쾰른대, 프랑스 라우에·란주반연구소와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여기서 이 박사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 신문은 9월 1일자에 이 박사의 연구 성과를 보도하면서 ‘이철호 박사 등 일·독·프 연구팀’이라고 썼다. 이 박사는 “한국 물리학계와도 연구 성과를 공유하고 싶은데 한국말을 못하는 것이 걸림돌”이라고 말했다.

그는 요즘 강연 활동으로도 바쁘다. 꿈의 초전도체 결정구조를 밝혀낸 뒤 강연 요청이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달 1, 2일 나고야에서 열리는 일본 중성자과학회에도 특별 강연자로 초청받았다.

재일동포 3세인 이 박사는 핵물리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아홉 살 때까지 프랑스·독일에서 학교를 다니다 일본으로 가 공부했다.

88년 국립 도호쿠(東北)대 물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97년 일본 과학기술청 특별연구원을 거쳐 2001년부터 AIST에서 근무하고 있다. 2005년부터는 연구소 내 벤처기업 대표이사도 겸직하고 있다. 2001년 일본인과 결혼해 한 살배기 아들을 두고 있다.

도쿄=김동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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