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을찾아서>15. 조주 柏林禪寺 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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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묻는다:한줄기 빛이 수십만 갈래로

갈라진다면, 이 한줄기 빛은

어디서 비롯된 것입니까.

답한다:조주는 아무 말 없이 짚신

한짝을 벗어 던졌다.

질문은 역시 ‘만법귀일(萬法歸一)’과 같은 맥락의 철학적 문제다. 그러나 조주의 답은 ‘만법귀일’때보다 훨씬 더 당혹스럽다.

‘조주척혜’라는 이 화두는 짚신을 벗어 던진데 초점이 있다. 질문자는 잘못된 기성의 논리적 사고에 빠져 있다. 질문자의 개념과 논리는 선이 요구하는 참된 실재(實在)와는 무관한 인간조작의 산물이다. 그래서 조주는 그 따위 질문은 아무 의미도 없다고 대답한다.

마치 짚신을 벗어 던진 것이 무의미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선은 ‘무의미’속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래야 무(無)는 유(有)의 어머니가 된다. 즉 세계는 직접적인 수단(직관력)에 의해서만 파악할 수 있지 개념화로 묶는 제한을 받아서는 안된다는게 짚신을 벗어 던진 의미다.

있는 그대로를 보아라. 빛이 여러 갈래일 때는 여러 갈래로,한 줄기일 때는 한 줄기로만 보면 된다. 공리적(功利的)논리는 직관을 방해할 뿐이다.

선은 우리가 기존의 관념으로 사물을 바라보는걸 막기위해 기행(奇行)·역설·모순·난센스등을 즐겨 활용한다. 따라서 선사가 사용하는 언어나 행동은 개념성을 갖지 않는 일종의 부르짖음이며 감탄이다.

짚신도 두짝이 아니고 한짝인데 주의해야 한다. 봐라! 하나(짚신 한짝)가 어디서 비롯됐고, 또 그 하나가 어디로 가는지를. 짚신이 떨어지는 곳(현실속의 일개 지점·수십만 갈래의 빛)이나 온 곳 (조주의 발·빛이 온 곳)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 짚신(빛)은 그대로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네 질문은 관념적이고 이론적일 뿐인 헛소리가 아니냐. 그의 부조리한 행동은 실제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보여주는 한 소식이다.

이러한 문제를 이해하는데는 지성이란 아무 쓸모가 없다. 오직 새로운 제3의 눈, 정법안장(正法眼裝)이라는 선적 방법으로서만 가능하다.

조주의 어록에는 ‘만법귀일’의 문제를 다룬 문답이 3개나 나온다. 또 하나의 문답은 이렇다.

문:모든 존재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답:용마루와 대들보·서까래·기둥이다.

문:저는 모르겠습니다.

답:두공(枓 )이 차수(叉手)를 하고 있는데 자네가 모르고 있는 거야.

이 문답 역시 만법의 근원은 만법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유·무라는 관념에 사로잡힌 간택(揀擇)이 된다. 조주는 눈에 보이는 현실의 사물을 곧바로 제시함으로써 이같은 간택의 딜레마를 탈출한다.

조주는 기둥위에서 대들보를 받쳐주는 보조 나무토막 두공(일명 옥로)이 가슴에 손을 모으고 경건한 예법의 자세(차수)로 대들보를 떠받치고 있다고 일깨워준다. 옥로(屋 )는 대들보·기둥과 함께 집을 지탱하는 ‘만법’의 하나다. 이처럼 차별상(기둥·서까래·두공)속에서 평등상(집)을 터득하는게 선의 묘체라는 이야기다.

만법은 공(空)한 것일 뿐이기에 그 절대무(無)가 바로 만법의 근원이 된다. 평등과 차별은 하나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른 것도 아닌게 선이 자리하는 곳이다. 선은 ‘예’와 ‘아니오’, 하나와 많은 것을 서양적 이분법으로 양단하지 않고 자재롭게 넘나든다. 이는 동양식 남녀 애정 표현이 ‘그를 사랑하느냐’고 물을때 내심은 ‘예’이면서 겉으론 ‘아니오’로 답하는 것과도 상통한다.

백림선사(옛이름 관음원)산문 기둥에는 ‘사장진제 천추탑(寺藏眞際 千秋塔)’‘문대조주 만리교(門對趙州 萬里橋)’라는 7언2구의 글귀가 새겨져 대련하고 있다. 방장실로 갔다. 방장은 북경에 가서 없고 상좌 명장법사가 차를 권한다.

그는 대뜸 “조주차(趙州茶)를 마시니 깨달음 같은게 오느냐”고 한마디 던진다. “와서 보니 이 지역에선 녹차가 안나는데 그 유명한 조주의 화두 ‘끽다거(喫茶去:차나 마시게!)’의 차는 어디에서 가져다 마시느냐”고 대화의 물꼬를 ‘형이하’쪽으로 돌렸다. 강서성 진여선사(속칭 운거사)에서 얻어다 마시는데 내년엔 운거사에서 차나무를 가져다 심어보겠단다. 통역은 출가 몇달밖에 안되는 조선족 승려가 자청해 나서주었다. 답사기간중 만난 유일의 교포 승려였다.

88년부터 승려가 입주, 현재는 30여명이 상주하고 있고, 소속 종파는 임제종이다. 참선은 전대중이 1일3주향(柱香:향 한개비가 타는 40분∼1시간의 참선이 1주향)을 한다고.

많이 드는 화두는 ‘평상심이 곧 도다(平常心是道)’‘뜰앞의 측백나무(庭前柏樹子)’‘무(無)’자등 모두 조주선사의 것들이다.

개산루(開山樓)에는 지난해 조성한 조주상(동상)만 모셨다. 동상은 일본에 소장돼 있는 옛 초상화를 원본으로 했다고.

유적의 하이라이트는 조주선사 사리를 모신 ‘조주탑’(원명 特賜大元趙州古佛眞際光祖國師之塔)이다.

8면 7층 전탑인데 당대 건립, 원대 중건했다. 지난 66년 지진때 탑륜이 일부 파손된채로 있다. 백림선사는 조주 때문에 유명해진 절이다. 고불로 칭송되며 ‘천하 조주’로 일세를 풍미한 선장 조주가 40년간 주석하면서 일가를 이룬 그의 선풍을 드날렸다. 조주는 80세까지 운수행각을 하고 나서야 방장으로 주석했다. 따라서 조주탑은 백림사의 간판격이다.

원래 이 절은 동한 헌제(196∼220)때 건립돼 관음원이라 했다. 그후 영안원(남송대)으로 개칭됐다가 원대에 백림선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최근 1백여년동안 폐사 상태로 방치돼 오면서 겨우 조주탑과 당백(唐柏) 20여그루만 남아 있는 정도였다.

현재 복원된 웅장한 규모의 사찰은 80년대 후반 이후 중건된 것이다.

매년 여름 전국 불자대학생들이 모여 1주일씩 참선수련을 하고 있다. 방이 4백50개나 되는 거사및 일반 신도용 운수루(雲水樓:요사채)가 완공단계다. 2002년까지는 세계 선학도들을 수용할 국제선센터(방 6백개)도 건립할 계획이다.

현재도 선학연구소가 설립돼 있다. 학·석사 학위를 가진 승려 3명, 거사 7명이 연구원으로 조주선풍을 진흥하는 사업들을 추진중이다.

백림사 복원불사에 특기할만한 점이 하나 있다. 바로 소박한 대웅전이다.

옛 선종사찰은 원래 법당(설법당)만 있고 대웅전(불당)은 없었다. ‘백장청규(원명 선문규식)’는 법당의 중요성에 대해 ‘불전을 두지 않고 법당만을 두는 것은 불조(佛祖)의 전등(傳燈)을 존중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백림사는 이 법도를 따라 대웅전에 조그만 백옥 석가모니불 하나만 모셨다. 중국사찰 대웅전들의 집채같은 웅장한 불상과는 확연한 대조를 이룬다.

그래서 신도들은 대웅전 불상이 너무 초라(?)하다고 자꾸만 아쉬워한단다. 사찰복원 재정은 주로 해외 교포신자들의 화주가 큰 몫을 한다.

기자가 답사한 80여개의 선종사찰중 가장 여법한 선종 본래 면목의 사찰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증명:月下 조계종종정 ·圓潭 수덕사방장

글:이은윤 종교전문기자 사진:장충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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