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프라를세우자>13.출판사 육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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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인구 4백만인 노르웨이는 책이 1만부만 팔려도 온 나라가 떠들썩거린다.이 나라가 배출한 세계적 베스트셀러 소설가로 요슈타인 가아더가 있다.
그의 대표작.소피의 세계'는 93년 이후 세계적으로 무려 1천만부나 팔렸다.인세를 권당 2달러로 잡아도 자그마치 2천만달러(약1백70억원)에 달한다.자동차 1만대이상을 수출한 것과 맞먹는 효과다.
글로벌시대 문화의 중요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다.
정보시대에는 총체적 사회발전의 인프라는 곧 문화라는 인식이 절실히 요청된다.그중에서도 정보와 지식을 담는 그릇인 출판이 근간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세계는 지금 출판 전쟁시대에 돌입했다.전쟁은.지상'에서만 치러지는 것이 아니다.인터넷을 통해 가상공간에서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지난 20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폐막된 유엔 산하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회의에서는 1백60여개국 대표들이 가상공간에서도 저작권을 인정해주기로 합의했다.이런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최전선에 나서 싸울 출판사들에 충분한 실탄을 공급해야 한다. 미국.일본등 출판 선진국의 경우 무엇보다 책을 읽게 만드는 사회풍토가 가장 큰 무기로 꼽힌다.
우리의 실정은 어떤가.정부는 정부대로 정책부재현상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출판의 꽃인 학술출판물을 소화해야 할 대학도 예산부족으로 손을 놓고 있는 상태다.지원사격이 모자라는 출판계는 그야말로 빈사상태에 빠졌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공공및 대학 도서관의 예산부족 따위는 이제 더이상 입에 올리기 민망할 정도로 수없이 거론됐다.
이번에는 우리사회의 책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자.
먼저 정치인과 행정관료들의 인식이다.97년 예산안 심의에서 공공도서관의 도서구입비 40억원 증액안을 그대로 잘라버렸다.월드컵 개최 준비를 위한 예산부담 때문이었다.
문화체육부의 출판진흥과의 올해 1년 예산은 22억원.이중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예산으로 18억원이 지출되고 순수하게 출판진흥에 쓰인 예산은 겨우 4억여원에 지나지 않는다.새해 예산도 간행물윤리위원회의 19억원을 포함,26억여원에 그 치고 있다.
출판관계자들이 정부에 대고“출판 진흥은 커녕.규제'만 해왔다”고 분통을 터뜨리는 심정이 이해된다.냉전체제가 붕괴됨에 따라이데올로기 문제도 크게 해소된 상황에서 간행물윤리위원회가 계속존속해야 하는가라는 회의가 제기되는 것도 바로 이런 현실 때문이다.18억원이면 1만원짜리 학술서적 18만권에 해당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때다.
책이란 개념에 대한 인식도 구태의연하다.책의 개념이 전세계적으로 종이책을 넘어 전자출판으로 확대되고 있는데도 우리는 아직종이책 수준이다.전자출판의 대표 주자인 CD롬을 책으로 인정하지 않고 계속 부가가치세 10%를 부과하고 있는 현실이 이를 잘 입증한다.
세계적 출판사인 사이먼 앤드 슈스터사의 경우 CD롬이나 인터넷을 통한 전자출판의 매출고를 현재 25%에서 2000년에는 50%로 높인다는 야심찬 계획을 잡고 있다.
이 출판사는 한걸음 더 나아가.디지털 문서보관소'를 구축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출판사가 문화전쟁시대의 첨병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도 바로 이런 지식및 정보의 저장 역할 때문이다.이회사가 이 프로그램에 쏟아부을 돈이 4억달러라니 부럽다.
낮은 책문화를 말해주는 또다른 예.도서를 신용카드로 구입할 경우 신용카드회사들이 물리는 수수료율은 3.5%로 아주 높다.
94년 10월 이전에는 이보다 더 높아 4%였다.반면 사치업종으로 손꼽히는 골프장이나 주유소에 대한 신용카드 수수료율은 1.5%며 백화점에 대한 수수료율은 3%다.뭔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다.
이런 현실에선 코앞에 다가온 출판시장 개방에도 그럴듯한 대책이 마련되기 어렵다.우리나라도 새해 1월1일부터는 출판및 유통시장 전반에 걸쳐 외국회사에 50%미만의 지분참여를 허용해야한다. 프랑스 굴지의 출판사인 갈리마르사의 경우 이미 웅진출판사에 합작회사 설립을 타진해오기도 했다.애디슨-웨슬리.롱맨.맥그로-힐.사이먼 앤드 슈스터등 이미 서울주재 지사를 열어놓고 있는 굴지의 출판사들이 본격적인 회사로 전환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출판개방에 대비하기 위해 지난 1월과 8월에 각각 출범한 한국출판유통과 한국출판정보통신도 아직 가시적인 결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출판계에서는 아직 한국의 독서시장 규모가 작다는 점을 들어 설마하는 입장이지만 외국출판사들이 들어올 경우 돈되는 대중물로쏠릴 것이 뻔하기 때문에 우리 독서풍토는 더욱 황폐화하게 마련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급적 모든 활동은 개인영역에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하지만 개인활동에 더이상 기대하기 어렵다고판단될 때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문화체육부가 새해에발표할.21세기 출판정책 청사진'이 어떤 모습일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정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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