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올림픽 30年·태권도 40年] 44. 릴레함메르 올림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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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서울 올림픽 개막 직전에 열린 서울 총회 때 노르웨이에서는 여성 총리가 왔고, 스웨덴에서는 국왕이 직접 대표단을 이끌고 왔다. 하루는 청와대에서 앵커리지를 지지해달라는 부탁이 왔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앵커리지가 개최지가 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1차 투표 때 ‘앵커리지’라고 써서 옆에 앉은 미국 IOC 위원 아니타 프란츠에게 보여줬다. 생색을 낸 것이었다. 예상대로 앵커리지는 1차에서 떨어졌다. 나는 서울 올림픽 때 도와준 노르웨이 스타보 위원에 대한 보은으로 계속 릴레함메르를 밀었다.

필자가 릴레함메르 올림픽 때 노르웨이 국왕(中), 스미르노프 러시아 IOC 위원(右)과 환담하고 있다.


릴레함메르 올림픽 개막일은 무척 추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유럽 왕족들이 대거 몰려왔다. 나는 IOC의 부위원장 겸 TV분과위원장으로서 올림픽 자체가 성공적으로 치러지기를 바람과 동시에 KOC 위원장으로서 한국 선수단의 좋은 성적도 기대해야 했다. 항상 2중, 3중으로 신경을 써야 했다.

당시 최고 스타는 단연 빙속 장거리의 올라프 코스였다. 내가 시상을 했는데 믿었던 김윤만(92년 알베르빌 올림픽 1000m 은메달)은 11위에 그쳤다. 여자 500m의 유선희도 5위에 머물렀다. 월드컵 등에서는 미국 선수와 곧잘 1, 2위를 다퉜던 터라 내심 메달을 기대하고 시상을 맡았는데 그만 김이 빠졌다. 우승자는 미국의 보니 블레어였다. 시상식 때 가까이에서 보니 블레어의 팔·다리는 유선희가 어린아이로 보일 정도로 굵고 단단했다. 피겨 스케이팅도 최하위권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쇼트트랙뿐이었다. 이때만해도 쇼트트랙은 인기가 없었고, 경기장도 60㎞ 떨어진 함메르에 있었다. 쇼트트랙 경기는 거의 대회 마지막에 있었다. 그때까지 한국은 노메달이었다. 동메달 한 개도 없었다. 걱정이 돼서 폴슨 빙상연맹 회장에게 “한국이 쇼트트랙에서는 메달을 딸 수 있겠느냐”고 물으니 “한두 개는 나올 것”이라고 해서 위안을 받았다.

전명규 코치가 이끄는 한국 쇼트트랙 대표팀은 채지훈·전이경·원혜영·김소희·김윤미 등의 활약으로 4개의 금메달을 휩쓸었다. 당당한 종합 6위였다. 쇼트트랙 첫 날 금메달을 2개 따고 숙소에 돌아오니 ‘축하한다’는 사마란치 위원장의 쪽지가 와 있었다. 나는 두 차례 시상을 맡아 전이경에게 금메달을 걸어줬다.

종합 6위에 올랐지만 쇼트트랙에만 집중됐고, 나머지는 전력 차가 컸다. 나는 이때 겨울종목도 발전하려면 좋은 시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실이 태릉 실내빙상장이고, 무주의 스키 점프대다.

한국은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겨울올림픽에서 스키점프 단체전에서 미국보다 한 단계 위인 7위에 올랐고, 빙속 이규혁, 피겨 김연아 등 세계 정상급 선수들이 탄생하면서 겨울스포츠에서도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김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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