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RIReport] 오바마는 ‘큰 정부’ 추진해도 한국선 ‘작은 정부’ 아직 유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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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경제에서 시작된 금융불안과 경기불황이 국내 경제로 번지는 가운데, 국내외에서 각종의 정책 제안이 난무하고 있다. 우리 정부도 금융·재정 면에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정책 수단을 동원할 태세다. 규제완화, 감세, 정부 개입과 규모 축소 등으로 대변되는 소위 ‘신(新)자유주의’ 정책기조를 뒤집을 만한 이들 정책,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 이롭고 바람직한 것일까 한번쯤 따져볼 일이다.

◆‘큰 정부’ 정책, 주류로 자리 잡는가

새로운 ‘진보적’ 정책조합이 ‘주류’ 정책론으로 자리매김할 것이 예견되는 배경에는 과거 수십 년 동안 접하지 못했던 글로벌 경제불안과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다.

우선 금융부문에 대한 정부 개입과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지고 있다.

지난 1년 동안, 특히 지난 한 달 반 세계 금융시장을 뒤흔들어 왔던 금융경색과 위기적 상황이, 그동안 (특히 미국과 영국에서) 금융규제를 너무 풀고 또 모든 선진국들이 너무 오랫동안 저금리 기조로 돈을 많이 풀어서 야기되었다고 본다는 얘기다.

금융부문에 대한 정부 개입 주장은 이제 실물경제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글로벌 금융불안이 글로벌 경기침체로 이어지고 있어서다. 정부 개입과 큰 정부를 ‘죄악시’하던 미국·영국까지 재정 투입을 핵심 수단으로 하는 소위 케인스식 경기부양 정책으로 돌아서고 있다.

버락 오바마의 대선 후 행보도 경기부양론을 부채질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는 향후 비상대책의 초점을 (감세 등을 통한) ‘중산층 구하기’에 맞출 것임을 선언했고, 또 자동차 등 특정 불황 산업이나 주요 기업에 대한 직접 지원을 예고했다. 재정을 통한 적극적 정부 개입이 오바마 정권의 주류 정책 수단으로 자리 잡을 것은 분명하다. 이미 신뉴딜 정책으로 명명되고 있는 오바마식 정책의 결말이 어떻게 되든 간에. 우리의 현 상황은 위기 대응책과 구조개혁을 병행 추진해야 하는, 적절한 정책 조합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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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안정이냐, 경기부양이냐

우리 경제는 정부의 금융 지원과 유동성 공급, 그리고 금리인하 등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금융불안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지속적으로 또 추가적인 정책 수단으로 금융안정을 꾀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또한 우리 경제는 경기순환적 요인과 금융경색 요인이 중첩, 언제든 심각한 경기불황이 닥칠 수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금융안정책과 경기부양책 중 어느 것에 더 비중을 두어야 할까 심사숙고할 단계는 이미 지났다. 두 정책을 병행 추진함으로써 두 정책 간의 선순환을 노려야 할 때다.

◆금융안정을 위해 추가적 완화(구제금융 포함)냐, 규제와 감독 강화냐

유동성 공급과 저금리 등 전통적인 금융안정책은 이미 실시되어 왔다. (언젠가는 나타날)그 효과가 아직 나오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정책의 강도가 미약해 그 효과가 앞으로도 나타나지 않을지는 나중에 판가름나겠지만 그동안 추진한 정책의 내용에는 큰 이론이 없다.

금융안정책을 결정적으로 바꿀 것이냐 여부는, 점차 심각성을 드러내고 있는 개인신용(주택담보대출 포함)과 제2 금융권 대출의 부실화 정도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금융경색 해소나 경기 불황세의 진정에 진척이 없는 경우, 공적자금을 동원한 금융기관 자본 충실화라는 극단적 조치까지 동원해야 할 상황이 도래할 수 있음에 유의해야 할 때다.

금융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국내에도 거세지고 있다. 금융규제 완화 조치는 오래전에, 또 (금융감독 능력에 비해) 과다하게 실시된 금융 선진국에서나 통할 수 있는 주장이다. 과도한 금융규제와 빈번한 금융시장 개입으로 금융산업 발전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또 국내 여타 부문에 비해) 뒤진 우리나라에서는 통용되어서는 안될 정책관이다.

(동북아 금융허브의 꿈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지금 우리 금융부문은 더 활성화시키고 발전시켜야 할 핵심 유망 성장 부문이다. 따라서 금융감독 능력을 배양하고 금융산업의 현대화에 부응토록 금융감독 제도를 개선하는 노력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금융규제는 감독능력 범위 내에서 지속적으로 완화해 나가야 할 것이다.

◆경기부양에 금융정책이냐, 재정정책이냐

우리나라는 아직까지는 경기부양을 위해 유동성 공급과 금리인하 등 금융정책 수단을 강도 높게 추진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만큼 (경제상황에 비추어) 유동성이 부족하고 인플레 위험이 낮을 뿐 아니라 정책금리 수준이 높다는 얘기다.

경기부양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재정정책 수단인 감세와 재정지출 확대에도 여유가 있다. 다른 나라에 비해 재정이 건전하기 때문이다. 향후 수개월 동안, 적어도 선진국의 경기불안이 진정될 동안에는 금융정책과 재정정책을 적절히 조합해 동원해야 할 것이다.

◆재정정책 중 감세냐, 재정지출 확대냐

평상시라면 재정지출 확대보다는 감세가 효험이 더 클 것이다. 법인세, 개인소득세 가릴 것 없이 기업과 개인의 세 부담을 줄여줌으로써 투자와 민간소비의 활성화를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민간경제 향후 전망의 불투명성, 정책에 대한 신뢰 부족, 해외 충격에 의한 불황, 기존 대출 상환 부담 등 때문에 소득과 투자자금이 지금보다 풍부해진다 하더라도 쉽게 소비나 투자가 활성화될 것 같지 않다. 재정지출 확대는 그 효과는 확실하지만 효과가 나타나는 데 긴 시간이 들고 또 여타 부문으로의 파급이 제한적이라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감세와 더불어 정부지출 확대라는 두 재정정책 수단을 동원해야 할 때다.

◆어떤 곳에 재정지출을 늘려야 하나

현재 추진되고 있는 정부지출 확대책은 사회간접자본(SOC) 확충에 집중되어 있다. 경기하강 속도를 줄이는 데 기여할 것이다. 문제는 SOC 확충이 경기 진정효과를 가지는 데 장시간을 요한다는 점이다. 이미 마련되어 있는 건설사업의 발주를 앞당기는 식으로 정부지출을 늘린다 하더라도, 그 경기 진정효과가 건설부문에서 여타 경제부문으로 확산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 효과가 발휘되기 전에 경기 하강세가 전 부문으로 확산되어 실기할 소지가 클 뿐 아니라, 해외경기가 진정된 후 그 효과가 발휘된다면 과다정책(정책의 overshooting으로 인한 물가앙등) 위험마저 우려된다.

따라서 경기하강 속도를 줄이기 위한 정부지출 확대는 (SOC 등) 하드웨어 부문보다는 (교육, 의료, 사회안전망 등) 소프트웨어 부문에 우선적으로 집중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중소기업 지원(금융지원 등)과 중산층·저소득층에 직접 혜택이 가는 방식(감세 등)으로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규제개혁은 지금 추진할 것인가, 안정 후에 추진할 것인가

시장경제 활성화를 위한 규제개혁은 늘 추진하고 있어야 하는 정책이다. 금융불안과 실물 경기불황을 타파해야 할 국가 과제를 눈앞에 둔 시점에는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할 정책이다. 특히 수도권 규제, 대기업 규제, 주택건설 관련 규제 등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과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억눌러온 규제들을 철폐·완화하는 것은 재정이나 금융부담 없이 경기불황을 타개할 수 있는 최선책이다. 빠를수록 좋다.

김정수 경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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