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자칼럼>고개숙인 남편.가슴앓이 아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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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삼한사온이 되돌아 왔다던가.푸근한 겨울 날씨를 맛보는 일도 어렵지 않은 요즈음이지만.심감온도(心感溫度)'는 어느해보다 추운 겨울이다.경기불황에 따른 인원정비로 명예퇴직이 줄을 잇는가하면 부도가 나 회사 문밖으로 떼밀려 나는 샐러 리맨들이 적지않다. 갑자기 일자리를 놓아버린 가장(家長)의 막막함도 크지만구들목 짊어진 남편을 바라봐야만 하는 아내의 고단함도 힘에 겹기만 하다.
“처음엔 퇴직한줄 몰랐지요.한달이 지나서야 산행으로 시간을 때우고 다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퇴직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니갑자기 눈치가 보이더라구요.가뜩이나 의기소침해 있는데 심사를 거스를까봐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꾹 참고 삽니다 .”(서울구의동 K씨) “당분간 불황은 계속 될테고 회사는 어쩔 수 없이감원해 나갈테니 퇴직금이라도 후하게 받아 새길을 모색하자길래 좋다고 했지요.가게를 시작했지만 불황에 무언들 쉽겠어요.남편은술이 늘어만 가고 조그만 일에도 화를 벌컥벌컥 내니 저도 견디기가 힘들어 밖으로 나돌게 됩니다.”(서울도곡동 S씨) “회사가 문을 닫았으니 어쩌겠어요.줄어드는 퇴직금 통장을 바라보는 것도 겁이 나요.아무런 대책없이 방안에서만 지내는 남편이 점점미워져요.한마디 해줬더니 오히려.남의 집 부인들은 밖에 나가서잘도 벌어오더라'며 핀잔까지 주지 뭡니까 ..이제까지는 내가 벌어 먹였으니 이제는 네가 먹여살려라'는 소리같아 억장이 무너지더군요.”(서울장위동 P씨) .고개숙인 남편'뒤에는.가슴앓이하는 아내'가 있다.집안에서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시시콜콜한데 까지 참견하는.남편 시집살이',왜 그집 양반은 출근하지 않느냐는 이웃 부인의 은근한 물음들도 이들의 가슴을 후벼파는 것들이다 .세밑이다.여기저기 송년모임도 적잖이 열린다.
퇴직한 이들에게도 작으나마 빈 자리를 권해보고 고단함을 함께하고 있을 퇴직자의 아내에게도 한마디 위로의 말을 건네주자.
시오노 나나미는.로마인 이야기'에서“실업은 당사자의 생활수단을 빼앗는데 그치지 않고 자존심을 유지하는 수단까지 박탈한다”고 했다.보통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이유를 스스로 확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행히 신한국당에서는 노동관계법을 개정하며 정리해고제 보완책으로 신규채용때 정리해고자 우선 채용을 의무화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실업문제는 복지로써는 해결되지 않고 일거리를 주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시오노의 주장이 더욱 가슴을 파고드는 12월이다.
홍은희 생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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