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칼럼>'토론하는 사회'라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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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흔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온도계의 눈금이 아니라 달력을 보고 옷차림을 바꾼다.기온과 관계없이 4월이면 코트를 벗고 6월이면여름 옷, 11월이면 겨울차림… 하는 식이다.
서구인들처럼 여름이라도 으스스하면 서슴지 않고 파카나 모직 코트를 입고 나서는 사람은 여간해선 만나기 어렵다.
떨면서도 홑겹옷으로 그냥 버틴다.
집단주의사회.타인지향적(他人指向的)사회가 낳은 우스꽝스럽고 무개성한 생활 습속의 일면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것이 불합리한들 그까짓 옷문제야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또 어떠랴.더구나 요즘 신세대들은 개성있는 옷차림을보여주고 있어 세월이 가면 옷차림의 집단주의는 저절로 사라질 것도 같다.
정작 문제인 것은 옷차림이 아니라 화석처럼 경직되고 외눈박이처럼 획일화된 우리 사회의 사고방식이다.우리 사회처럼 논쟁과 토론이 활성화돼 있지 않은 사회도 드물 것이다.정치성이 깃들인문제는 입을 봉하니까 그렇다 친다 해도 그런 정 치적 장벽이 없는 문화적.사회적 쟁점마저 좀처럼 논쟁과 토론의 불꽃이 튀지않고 있다.
생각해 보라.최근의 영화검열 문제나 포르노소설 문제만 해도 그 얼마나 뜨거운 논쟁거리인가.그러나 마치 통과의례같은 미적지근한 논의가 전개되더니 이제는 화제조차 안되고 있다.
그 대신 우리 사회처럼 정치적.사회적 쟁점뿐 아니라 문화적 쟁점마저도 마치 운동경기처럼 승패를 확연히 판가름하는 사회도 드물 것이다.한쪽 의견이 승세를 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세력이 강해져 약세에 몰린 측은 아예 입도 뻥긋 하지 못하게 만든다.그걸로도 성이 안차면 아예 검찰과 경찰이 개입해 사법처리를 해버린다.이 모든 것이 단세포적이고 획일적인 우리 사회의의식구조가 빚은 결과다.
눈앞에 다가온 21세기는 지식사회 혹은 지력(知力)사회가 될것이라고들 말하고 있다.지식이나 지력이 사회발전의 동력이 되려면 지적 축적이 두터워야 하고 그러려면 어떤 지식이나 생각도 널리 허용되고 유통되는 지식과 사상의 자유공개 시장이 열려있어야 한다.달리 말하면 사회구성원들의 개성과 사고의 다양성,그리고 창의성과 자율성이 최대한 존중되는 사회여야 하는 것이다.이런 기준에서 보면 비록 우리의 외형적 경제규모는 세계 12위 수준이라지만 지적.정신적 수준은 여 전히 후진국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엊그제 우리는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두 전직 대통령을 준엄히 심판했다.그러나 우리가 기대했던 귄위주의의 청산이 이 두 사람과 몇몇 추종자를 사법처리한다고 이뤄지는 것은 아닐것이다.우리 사회의 경직되고 획일화된 사고방식이 야말로 오랜 냉전시대.권위주의 시대의 통제가 빚어낸 산물이다.그렇다면 이런의식에서 탈피하는 것이야말로 권위주의의 실질적인 청산이자 21세기 지식사회에 대비하는 길일 것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 시절에도 권위주의 시대의 의식과 사고방식이 여전하다는 점이다.단 하나의 획일적이고 일방통행식 생각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논리가 발달할 수 없다.감정이나 정서가 이성과 논리를 압도하게 마련이다.중진국 이상의 나라치고 우리나라처럼 감정과 정서가 자주 그리고 중요한 판단기준이 되는 나라가 또 있을까.기준이 되어야 할 것은 결코.감정'과.정서'가 아니라 차가운.이성'과 치밀하고 체계적인.논리'일 것이다.
대통령선거가 1년 앞으로 다가왔다.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국가적 과제들에 대한 토론과 논쟁을 당내에서,당밖에서 활발히 전개해야 할 시점이다.정치인들이 앞장서서 그런 토론이나 논쟁을전개할 때 경직되고 획일화된 사고방식에도 변화가 올 수 있다.
이미 중대한 쟁점들이 여럿 제기돼 있다.남북한및 한.미관계,노동관계법,경제난의 해법등등이 그것이다.이들 문제는 실은 현 정권이 아니라 다음 정권을 맡는 사람이 직면해야 할 것이다.그런데도 언론에 보도된 대선주자들의 이에 대한 견해 나 인식은 지극히 피상적.원론적인 수준에 있고 그나마 차별성도 없다.이는입을 봉했다는 여건의 문제 이전에 체계화된 견해와 비전을 갖추지 못한 능력부족탓일 것이다.
다음 대통령은 지적 능력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데 국민적 합의가 이뤄지고 있다.그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대선후보들은 이제부터라도 심도있고 체계적인 논쟁과 토론을 제기하고 주도해 나가야 한다..토론하는 사회'라야 21세기에서 살아남을 수있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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