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붉디 붉어 슬픈 그대는 여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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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혜순(49)씨는 ‘여성(女性)’에 민감하게 반응해 왔다.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이후 4년 만에 펴낸 여덟번째 시집 『한 잔의 붉은 거울』에서도 그런 흐름은 여전하다.

무려 42쪽에 달하는 해설을 붙여 스스로 김혜순 시에 정통한 독자임을 드러낸 소설가 이인성씨는 김씨의 시가 “이항대립으로 맞물려온 남성/여성의 문제”를 늘 다뤄 왔다고 밝혔다.

남성에 이항대립적인 여성은 김씨의 시 속에서, 차고 이울기를 되풀이하는 달과 같은 주기를 가지고 있고 일종의 가해자인 남성에 대한 미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남성에 끌리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끓다’의 여성 화자는 “밤하늘 깊숙히 날아가는 너”의 열원을 자다가도 감지할 만큼 예민하다. “공대공 미사일”을 발사해 먼 하늘에서 가열차게 폭파시켜 끓어오른 나는 “잠자기는 글렀으니 커피나 한 잔” 마시기로 하고 냄비에 물을 끓인다. “몸 내부로만 꽂힌 수만개의 붉은 전선들이 안으로 안으로 전기를 방출”해 내부가 “손을 넣기만 해도 감전사해버릴” 것처럼 달아오른 화자는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전파 탐지기야 미사일이야”라고 중얼거린다. 남성에 끌리는 하이테크적인 본능이다.

‘BASKIN ROBBINS 31 대학로점’에서 엄마와 딸은 나란히 아랫배가 불룩하게 달을 가졌다. 여기서 ‘달’은 주기를 반복하는 여성성으로 읽힌다. 딸은 아이스크림 집에서 새벽빛 도는 상현달 같은 피스타치오 아몬드를, 엄마는 낮과 밤이 경계없이 몸 속으로 넘나드는 보라빛 하현달 같은 체리주빌레를 각각 주문한다. 엄마와 딸 사이지만 둘의 달은 다른 것이다. 둘은 영화가 끝나도록 각자의 아이스크림을 행복하게 핥아 먹는다.

그러나 ‘구멍’에서는 성적으로, 경제적으로 약자인 여성에 대해 자조적이다. 밥도 잘 짓고 아기가 튀어 나오기도 하는 “일 미터 육십 센티 정도 되는 구멍”인 여성은 속에다 누가 침을 갈겨도 모른다.

여성은 때때로 얼음처럼 차갑게 된다. ‘오래된 냉장고’의 화자는 얼음나라의 순결한 얼음공주다. 공주는 자신의 차디찬 발을 만진 사람은 모두 기절하고 가슴 속으로 들어오는 누구나 입술이 얼어붙기 때문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말고 아무에게도 손뻗지 말자고 다짐한다.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얼음을 담고 사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아 보인다는 점이다. ‘얼음의 알몸’의 얼음아씨는 “땡볕 쏟아지는 여름 그 큰 얼음을 아픈 사람처럼 담요에 싸안고/눈물을 훔치며 가던 사람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 또 “다 녹아서 흘러가버린 우박창고에 우두커니/서 있어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

‘시 같은 거’는 본래 아름답지만 근래 너절한 것으로 취급받는 시의 현실을 그렸다. 꿈의 골짜기까지 헤엄쳐 가 훑어온 미역 줄기 같은 시들이 햇빛 속에서는 검게 썩어 아스팔트 바닥에 문드러지는 처참한 신세다.

이인성씨는 “새 시집에서는 붉은 전선, 빨간 물고기, 붉은 구름, 붉은 아기, 붉은 양수 등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붉은색이 낭자하다”며 “치밀어 오른 붉은 것이 뜨거운 피, 불, 꽃 등으로 물질화되어 거침없이 치달린다”고 썼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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