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외환보유액, 양보다 질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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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0월 내내 원-달러 환율 변동이 하루 평균 3.19%나 됐다. 정상적 시장에선 볼 수 없는 이런 ‘특단의 외환위기적 상황’은 우리 외환시장의 근본적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현재 핵심적 문제는 두 가지로 모아진다. (1)은행이나 기업과 같은 민간 부문에서 외환을 공급해줄 능력이 있는가 (2)한국은행의 외환보유액은 정말 충분한가 여부다.

첫 번째 문제의 경우 한국계 은행이든 외국계 은행이든 넉넉한(수백억 달러 규모) 외환을 차입해 올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인다. 국제시장에서 신용위험이 가라앉지 않은 데다 신용위험스와프(CDS)률도 최악의 상황을 달리고 있다.

그런 여건이니 은행도 아닌 기업이 해외에서 차입하거나 회사채를 발행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수출을 통해 외화를 공급하는 것도 미국이나 중국의 경기침체를 생각하면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외환시장 위기해결의 핵심은 두 번째 문제, 즉 중앙은행의 외환보유액 충분 여부에 귀결되는 것이다. 한국 정부나 한국은행이 줄곧 강조해온 핵심은 2396억 달러(2008년 9월 현재)에 달하는 외환보유액이 ‘세계 6위에 달할 만큼 많으며 충분하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규모만 따진다면 우리보다 외환보유액이 더 많은 러시아나 인도의 경제는 안전한가? 그리고 우리보다 외환보유액이 훨씬 적은 캐나다, 독일 및 프랑스는 외환위기에 더 취약한 나라란 말인가?

외환전문가들이 진정으로 우려하는 것은 다른 데 있다. 한국은 무차별적 차입으로 8년 만에 다시 대외채무국으로 전락할 위험이다. 따라서 막강(?)한 외환보유액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단기 대외채무와 여타 외환지급수요를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게 문제의 핵심이다.

외환시장에 불안감을 느끼게 된 표면적인 이유는 우선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 국제적인 신용경색으로 차입여건이 극도로 악화됐다는 것이다. 또 국가부채에 잡히지 않은 150조원 이상의 외국인 주식 투자자금이 하루 수억 달러씩 수개월간 역송금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그러나 외환시장 불안감의 결정적 이유는 ‘과연 한국은행의 외환보유액이 얼마나 건전하고 안전한 자산으로 되어 있을까’하는 의구심이다.

한은이 투자한 미국의 패니메이(Fannie Mae)와 프레디맥(Freddie Mac)은 국유화됐다. 전 세계적으로 금융자산 가격도 크게 하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유독 한은의 보유자산만 털끝만 한 손실도 없이 완벽하게 장부가격대로 유지하고 있으리라 믿기는 어렵다.

게다가 달러 대비 유로화 가치가 연일 폭락(올 들어 14.8% 하락)했으니 외환보유액 가운데 유로화 표시자산도 상당한 평가손이 났을 것이다.

만약 시가기준으로 자산가격이 20% 하락했다면 한국의 실제 외환보유액은 1900억 달러 수준이고, 40% 떨어졌다면 1440억 달러에 불과할 것이다.

한은의 해외 자산 구성은 외국 금융시장이 더 잘 알고 있을 수 있다. 일부 외국 투자은행과 기관투자가들은 한은의 해외 투자자문에 임했거나, 중개 또는 위탁운용을 위임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서울보다 뉴욕과 런던 시장에서 한국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드디어 한·미 간에 300억 달러 규모의 통화스와프 협정이 체결됐다. 이는 사실상 한국이 3개월간 최대 300억 달러를 빌려 쓴다는 단기차입 협정이다. 결국 위에서 제기했던 두 번째 문제가 한계를 드러냈다는 방증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비슷한 여건 아래서 중국·말레이시아·인도도 겪지 않는 홍역을 우리가 치르고 있는 게 문제다. 1985년과 97년과 2008년의 외환위기, 그리고 다음은 또 언제가 될까?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