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하는국책사업>1.농촌지원구조개선사업 정읍 현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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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정부 각 부처가 국가예산을 비효율적으로 운용해 결과적으로 막대한 예산낭비를 초래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농촌구조 개선사업.맑은 물 공급 종합대책등과 같이 천문학적 액수가 투자됐지만 성과가 미미하거나 잦은 사업변경으로 막대한 예산이 낭비되는 사례가 많다는 비판이다.현실에 맞지 않은 사업을 기계적으로 밀어붙이거나 이미 필요가 없는 일에 계속 사업을 벌여 예산을 남용하는 경우도 수두룩한 것으로 지적됐다.국정감사.국회 결산심사.
감사원 감사자료에 나타난 예산낭비 지 적사항을 토대로 대표적인국책사업 현장을 점검해본다.
[편집자註] 정읍시내에서 8㎞쯤 떨어진 태인면거산리 신기마을은 시설채소(오이.고추.딸기등)재배 시범단지다.93년부터 이 마을 농민 13가구는 정부방침에 따라 연동(連棟)비닐하우스와 소형 유리온실을 세웠다.
비닐하우스들을 이어붙이고 온도가 자동 조절되는 센서장치까지 부착해 많은 노동력 없이도 특작물을 생산하게 한다는 취지였다.
“공짜돈인 정부보조가 50%나 되고 융자도 30%가 끼어 있어 농민들이 너나없이 신청했습니다.정부가 연구한 첨단시설이라는데 당연히 잘 될거라고 생각했죠.” 마을농민 김영근(金永根.45)씨의 말이다.
정부는 우루과이라운드에 대비,농촌을 살리기 위해 92년부터 98년까지 42조원 규모의 농어촌 구조개선사업을 시행하고 있다.해방후 단일사업으론 최대 액수다.
이미 95년까지 20조원이 투입됐다.그러나 감사원은“예산집행이 극히 비효율적”이라고 지적했다.전남도의회도 농촌의 현실에 맞지않고 부실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연동비닐하우스 사업도 그중 하나다.정부는 대대적인 홍보를했고 94년엔 농촌진흥원장까지 방문해 농민들을 격려했다.
그러나 4년이 지난 지금 이 단지는 흉물스럽게 변해 있다.단지입구부터 비닐이 찢어지고 안에는 잡초만 무성한 버려진 비닐하우스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망했습니다.첨단이라는 이 비닐하우스를 한겨울 유지하려면 연료비가 1천만원 정도 들어요.무슨 수로 그걸 감당합니까.” 농민 김금철(金今哲.41)씨의 하소연이다.
그는“비닐하우스를 철거하고 거기다 다시 논농사를 짓고 싶지만그것도 못한다”고 했다.
연동비닐하우스는 기둥마다 콘크리트를 박아 놓아 철거비도 엄청나고 무엇보다 정부가 융자금을 당장 반납하라고 요구할게 뻔하다는 것이다.
金씨는“전체 농가 13가구중 5가구 정도가 포기했는데 빚독촉이 겁나 대부분 주소는 이전하지 않은채 이농해 버렸다”고 말했다. 연동비닐하우스를 재배하기전 1천만원이던 金씨의 농가부채는올해 3천5백만원으로 불어나 있다.하지만 정읍시청에는 이 단지의 모든 농가가 열심히 농사도 짓고 수익을 올리는 것으로 보고돼 있다.
문제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현상이 신기마을이나 시설채소 재배단지들에서만 나타나는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정부가 야심적으로 벌인 수많은 사업들에서.배보다 배꼽이 큰'부작용이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정읍에는30개의 위탁영농회사가 있다.이농현상으로 노동력이 부족하다는 점에 착안해 5인 이상의 농민이 위탁영농회사를 차리면정부가 트랙터.콤바인.이앙기등 농기계 구입을 대폭 보조하는 것이다.보조와 융자가 90%다.농민 5명이 2백 만원씩만 내면 1억원어치의 농기계를 살 수 있는 꼴이어서 신청이 쇄도했다.
정읍시의 경우 여기에 94년과 지난 해에만 보조 및 융자금 13억원 이상을 지출했다.그러나 이 위탁영농회사들은 현재 대부분 도산상태다.“농사를 맡기는 농민들이 없어요.위탁회사에 돈주고 나면 남는 게 없으니까요.”태인위탁영농회사를 운영하다 도산한 농민 이효신(李孝信)씨의 말이다.그는“일부 농민들이 농기계를 공짜로 얻는 방편으로 엉터리 위탁회사를 차리는 게 태반이고융자금 때문에 서류상으로만 잘된다고 보고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정읍시청은 위탁영농회사들의 경영실적서를 제출받았다..순익감소로 도산우려(상평위탁)'.운영에 많은 어려움(농후위탁)'.위탁농 원하는 농가 극소수(화신위탁)'.위탁영농회사 불필요(번영위탁)'등 답변은 한결같이 부정적이었다.그러 나 정읍시청은 내년에도 10개의 위탁영농회사를 추가 설립한다.이름이 신문에 나는 것을 꺼린 시청의 담당공무원은 “위에서 하라니까 하지만 사실 별 효과는 없다”고 말했다.사업의 실효성이야 있든 말든 다음해 다시 지원받기 위해서라도 중 앙에서 내려온 돈은 무조건 써 버리는 관료주의가 그대로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정읍에는 25개의 농산물간이집하장이 있다.농산물의 세척.포장.저장을돕고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정부보조 80%,자기부담 20%로 건립된 것이다.
그러나 농산물을 집하한다는 본래 목적대로 쓰이는 간이집하장은거의 없는 실정이다.마을 곳곳마다.정부보조사업'이라는 안내판이달린 거대한 집하장들이 을씨년스럽게 서 있을 뿐이다.정부보조를1억원 넘게 받아 95년10월 완공된 신태인 간이집하장은 지금까지 텅텅 비어 있다.나머지 20여개의 집하장 역시 문이 굳게잠겨 있거나 농산물 대신 각종 잡동사니만 잔뜩 쌓여 있다.
“책상에 앉아 계획짜고 돈만 내려보내면 농촌이 저절로 잘 살거라고 생각하는 게 말이 되나요.”신태인읍에서 만난 농민 金모(43)씨는 텅빈 간이집하장을 가리키며 성토했다.
정읍농민회 이해현(李海賢)회장은“98년 이후에는 농촌에 그렇게 많은 돈을 쏟아 부었는데 왜 경쟁력이 되살아나지 않느냐는 비난여론이 일게 뻔하다”며“전국적으로 벌어지는 이 어처구니 없는 시행착오에 대해 근본적인 개선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정읍=김종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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