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가락 당국자 말 “외환위기와 다르다” 열흘 만에 “그때보다 더 어렵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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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이 바뀌면 내년엔 주가가 3000을 돌파할 수 있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선 후보 때인 지난해 12월 14일 한 말이다. 서울 여의도 대우증권 본사를 방문한 자리에서였다. 이어 “나는 실물경제를 한 사람이기 때문에 허황된 정치적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며 “아마 임기 5년 중에 제대로만 되면 (주가가) 5000까지 가는 게 정상”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당시 1895.05 포인트였던 코스피지수는 24일 938.75 포인트로 반 토막났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23일 금융위기 관련 관계장관 회의를 한 뒤 브리핑에서 “(국내) 금융회사들의 외화유동성은 건전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고 판단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이미 은행들은 외화가 모자라 하루짜리 초단기 자금인 오버나이트라도 빌리려고 동분서주하던 때였다. 약 2주일 뒤인 6일 강 장관은 시중은행장 간담회에서 “유동성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은행들이 해외자산을 조기 매각하는 등의 자구 노력을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경제정책 책임자들의 빗나간 판단과 오락가락하는 발언이 불신을 키우고 있다.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해 국민에게 실상을 알리고 대책을 세워야 할 당국자들이 말을 쉽게 하고 뒤집는 바람에 스스로 신뢰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현 상황 인식도 오락가락이다. 이 대통령이나 강 장관은 1~2주일 전만 해도 현재의 위기가 ‘아주 심각하지는 않다’는 견해를 보였다. 이 대통령은 13일 라디오 연설에서 “어렵긴 하지만 외환위기 당시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고 말했다. 그러다 22일 전국 경찰 지휘관들과의 청와대 오찬에서는 “현재는 IMF 때보다 더 어려운 시기”라고 말했다.

전광우 금융위원장은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진 직후인 지난달 17일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우리 금융시장이 이른 시일 안에 안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동성이 풍부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지금 은행권에서는 달러는 물론 원화마저 말라가는 실정이다. 결국 전 위원장은 24일 정무위 국정감사에서 “금융위기의 파급효과가 10년 전에 비해 상당히 클 수 있다”며 말을 바꿨다.

성신여대 강석훈 교수는 “정부가 오락가락하며 신뢰를 잃는 바람에 시장에는 ‘정부가 뭔가 큰 부실을 숨기고 있는 것 아닌가’하는 불안이 퍼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런 불안이 주식 투매를 일으키고 환율을 치솟게 했다는 것이다.

정책도 이리저리 흔들린다. 부동산 대출 규제는 한때 정부가 자화자찬하던 정책이었다. 강 장관은 6일 국정감사에서 “주택담보비율(LTV),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는 적절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보름 뒤 정부는 10·21 부동산 대책을 내놓으면서 수도권 투기지역을 대폭 해제해 부동산 대출 규제를 완화하겠다고 밝혔다. 연세대 정갑영 교수는 “정책이 원칙 없이 휘둘리기 때문에 한국 정부의 위기대처 능력이 떨어진다는 인식이 국제사회에 퍼지고 있다”고 말했다.

권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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