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스트라 피트의 비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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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의 지휘자용 보면대 옆에는 ‘교통신호등’이 달려 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위한 표지등이다. 녹색 불이 켜지면 마음 놓고 떠들어도 된다. 노란색 불은 튜닝을 하라는 신호다. 빨간색 불이 들어오면 객석 조명이 꺼지고 공연이 곧 시작되니 조용히 하라는 얘기다.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가 직접 설계한 이 극장은 객석에서 오케스트라 피트(orchestra pit)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무대와 객석 사이엔 온통 칠흑같은 어둠의 심연만 존재할 뿐이다. 오케스트라 피트를 지붕으로 거의 가렸기 때문이다. 지휘자는 겨우 가수의 얼굴만 볼 뿐이다.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가수들의 노래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지휘자도 가수의 입모양을 보고 겨우 박자를 맞춰 나간다. 바이로이트 극장은 지붕을 거의 뒤덮은 선큰형 오케스트라 피트의 대표적인 경우다.

처음엔 객석에서 오케스트라 피트에 비치는 조명이나 보면대 램프에서 나오는 빛을 차단하기 위해 중앙에만 덮개를 사용했는데 1882년 바그너가 직접 지휘봉을 잡은‘파르지팔’초연 때부터는 음향적인 이유 때문에 전체를 덮어버렸다. 그후 오케스트라 덮개는 ‘신성불가침’의 전통처럼 내려오고 있다.

오케스트라 피트에 덮개를 씌우면 고주파보다 저주파가 쉽게 빠져나간다. 고음은 약음기를 사용한 것처럼 볼륨이 약해지는 대신 더블베이스, 첼로, 튜바 등 저음 악기는 풍부하게 들린다. 전체적으로는 매우 음산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는 효과를 낸다. 오케스트라가 포르티시모로 연주하더라도 피아니시모로 노래하는 가수의 목소리를 뒤덮지는 않는다.

바이로이트 극장은 지휘대에서 무대 쪽으로 점점 내려가는 여섯 개의 계단 위에 아홉 줄로 악기를 배치했다. 다른 극장에서처럼 반원형으로 빙 둘러 앉는 게 아니다. 지휘자와 멀어질수록 낮은 위치에서 연주한다. 맨 앞줄의 왼쪽은 제2바이올린, 오른쪽은 제1바올린. 3∼4열은 비올라, 5열은 첼로, 더블베이스는 첼로 양쪽에 포진해 있다. 그 다음이 목관악기와 하프, 맨 아랫쪽에 금관악기와 타악기를 배치했다.

바이로이트에선 지휘자와 단원은 모두가 턱시도 시원한 반팔 티셔츠 차림으로 연주한다. 턱시도를 갖춰 입지 않은데다 자리에서 일어나도 객석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커튼콜 때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일제히 일으켜 세우는 법도 없다. 바이로이트 극장의 오케스트라 피트는 130명까지 수용할 수 있다.

바이로이트 극장에선 오케스트라 소리가 지하에서 서로 모나지 않게 배합된 후에 객석 쪽으로 빠져 나온다. 하지만 악기 간의 앙상블이나 명료한 연주는 기대하기 힘들다. 지휘자도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은 “(바이로이트 극장에서 지휘하는 것은) 마치 산소통 헬멧을 쓰지 않고 바다속 150 피트까지 잠수하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옆자리 단원이 내는 악기 소리 외에는 거의 들리지 않아 지휘자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던 단원들은 “우리는 음악가가 아니라 기계다”라고 불평을 늘어놓기도 했다.

오페라 극장에서 오케스트라를 무대 아래쪽에 배치한 것은 시각적ㆍ음향적 고려 때문이다. 무대의 시야를 가리지 않고 오케스트라 음향이 가수의 노랫소리를 압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금관악기나 타악기 주변 벽면에 흡음 커튼을 드리운 곳도 있다. 바이로이트 극장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오페라 하우스는 지붕이 탁 트인 ‘욕조형’ 피트를 채택하고 있다. 그래서 2~4층에선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연주 모습을 어렴풋하게나마 볼 수 있다. 검정 양복에 검정 셔츠를 입는 극장도 있다. 가능하면 관객의 눈에 덜 띄게 하기 위해서다.

베르디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지휘자는 무대 앞쪽에 바싹 붙어 지휘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무대쪽을 향해 앉아서 지휘자 뒤통수를 보며 연주했다. 드가의 ‘파리 오페라 오케스트라’(1869)에서도 단원들의 시선은 무대 앞쪽을 향하고 있다. 더블베이스 주자도 관객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 있다. 요즘엔 지휘자 정면에 카메라 렌즈를 설치해 가수들도 극장 발코니석 좌우에 모니터로 지휘 동작을 보면서 노래할 수 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메트) 오케스트라는 공연 때 턱시도 정장을 입는다. 메트의 오케스트라 피트는 95명까지 수용할 수 있다. 무대 바닥 아래쪽을 1m 정도 파서 타악기, 금관악기를 배치했다. 오페라 극장 설계 때 참고하는 건축음향학 교과서에는 오페라 피트에서 연주자 한 명당 1.5~1.7㎡, 팀파니를 비롯한 타악기는 10㎡, 지휘자는 4㎡의 공간이 필요한 것으로 되어 있다. 객석 1층 바닥에서 오케스트라 피트의 울타리까지의 높이는 1m다. 지휘자가 지휘대 위에 앉아 있을 때 지휘자의 눈높이가 무대 바닥보다 낮아서는 안 된다. 최근엔 코펜하겐 오페라 하우스처럼 공연 장르에 따라 피트 공간을 객석 또는 무대로도 쓸 수 있도록 가변형 시설을 갖춘 곳도 많다. 객석에서 무대 쪽으로 보았을 때 왼쪽과 중앙에는 현악기, 오른쪽에는 관악기와 타악기를 배치하는 게 보통이다. 계단식으로 되어 있는 오케스트라 피트에선 지휘자와 가까운 높은 계단에는 현악기, 낮은 쪽에는 관악기와 타악기를 배치한다.

오페라 극장 소속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오전 10시30분에 출근해 리허설과 공연을 끝내면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집에 도착한다. 바그너의 오페라‘파르지팔’은 연주시간이 휴식 포함해 6시간이나 걸린다. 식사시간도 제대로 챙길 여유가 없어 백스테이지에 있는 출연자 식당에서 간단히 요기하거나 리허설이나 연주 사이의 휴식 시간에 빵조각을 뜯기도 한다. 늦은 오후에 점심 겸 저녁을 먹기도 한다. 여유있게 밥 먹을 수 있는 시간은 공연이 끝난 다음 새벽 1시쯤이다. 그래서 유명 오페라 극장 근처에 단원들이 단골로 가는 레스토랑은 밤 늦도록 영업을 한다.

매일 밤 비교적 폐쇄된 공간에서 연주를 하다 보니 귀마개를 사용해야 할 정도로 소음으로 인한 청력 감퇴와 난청 등 ‘직업병’이 심각하다. 뉴욕 메트 오케스트라의 관악 파트는 수석 주자가 거의 두 명씩이다. 연중 무휴로 오페라를 상연하기 때문에 수석들은 격일제로 근무한다.

극장 무대 바닥에서 스포트라이트도 못 받으면서 연주하는 오페라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오프 시즌 때는 남부럽지 않게 무대 위에서 심포니 콘서트를 연다. 해외 순회공연도 다닌다. 드레스덴 젬퍼 오퍼 오케스트라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오케스트라는 1982년부터‘라 스칼라 필하모닉(Filarmonica della Scala)’라는 이름으로 활동 중이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도 빈 슈타츠오퍼 오케스트라 출신 멤버들이 결성한 교향악단이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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