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자로가는길>부안 내소사 지장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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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내소사 경내에 지장암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그러나 이정표 없는 지장암을 찾아가 인자하게 생긴 관음봉이나 호기를 주는 사자바위를 바라보는 것도 정복(淨福)이리라.
암자 입구에 선 단풍나무를 보니 가을이 더욱 깊어가고 있는 것같다.가을 햇살을 받는 단풍잎들이 법당의 단청처럼 원색의 깊은 색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지장암은 선방인 서래선림(西來禪林)과 나한전,그리고 요사채,정랑 하나가 가람의 전부다.암자의 가족으로는 비구니 스님들과 강보리.꿀보리라는 이름을 가진 두 마리의 개가 전부고,거기에 하나를 더 끼워준다면 장독대 옆에 선 후박나무라고나 할까.낙엽을 떨구고 있는 후박나무는 수척한 철인(哲人)의 모습으로 명상에 잠 겨 있다.
『내소사 스님들 사이에 청련암에는 시인이 살기 좋고 지장암에는 철인이 살기 좋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지요.』 주지인 일지(逸智)스님의 설명이다.내소사 하면 선승이자 학승인 해안(海眼)스님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는데,해안스님의 속가 넷째딸이 바로일지스님이다.스님이 지장암에서 수행하고 있는 것은 견성한 해안스님이 보림을 위해 머무른 곳이 바로 지장암이기 때문일 것이다.불가의 보림이란 깨친 경지를 가지고 자재하게 수행하는 것을 말하는데,해안스님은 지장암에서 서래선림을 연 뒤 참선도 하고 선시도 지어 제자들을 지도했다고 한다.해안스님의 시 한수를 보니 깨친 경지가 무언 지 간접적으로나마 다가온다.
「맑은 새벽에 외로이 앉아 향(香)을 사르고/산창(山窓)으로스며드는 솔바람을 듣는 사람이라면/구태여 불경을 아니 외워도 좋다./…구름을 찾아가다가 바랑을 베개하고/바위에 한가히 잠든스님을 보거든/아예 도(道)라는 속된 말을 묻 지 않아도 좋다.」 법당 뜨락에는 서리를 맞은 장미꽃과 달리아꽃이 조금씩 시들어가고 있다.어쩔 수 없이 고운 꽃에도 가을의 음영이 드리워지고 있는 것이다.다만 굴렁쇠를 보면 굴리고 싶어지듯 입에 넣고 꽉 물어주고픈 꽈리나 주렁주렁 감이 열린 감나무만 이 가을을 타지 않고 있다.
『큰스님이 계셨던 곳이라서 그런지 지장암을 찾은 신도분들 얘기는 마음이 편해지는 도량이라고 해요.』 그러고 보니 지장암에는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들만 모여 있다.서래선림 지붕너머의관음봉은 관세음보살님처럼 미소를 짓고 있는 듯하고,스님이 내주는 솔차는 익은 술처럼 향기롭고,뜨락에 누운 강보리나 꿀보리의모습에서는 「개팔자가 상 팔자」라는 속담이 떠오른다.
그냥 편안하게 쉬었다 가는 지장암이다.암자를 나서려는데 강보리가 스님과 함께 따라나온다.염주란 불자의 목에 거는 물건인 줄 알았는데 강보리도 목에 걸고 있다.하긴 개한테도 불성(佛性)이 있다고 하니까 이상하게 볼 일만은 아닌것 같 다.
◇지장암 가는길=내소사 일주문을 들어서 왼편으로 난 길 끝에있다. 글:정찬주〈소설가〉 사진:김홍희〈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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