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작기행>"또 하나의 평화" 필립 섀비코프著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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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환경론의 핵심적 개념중에 「preservation」과 「conservation」이 있다.둘 다 자연이나 환경을 보호하자는기본 의미는 마찬가지지만 실질적인 태도에는 큰 차이가 있다.「보존(保存)」으로 번역되는 전자는 손대지 않고 그대로 남겨둔다는 뜻인 반면 「보전(保全)」으로 옮겨지는 후자는 이용을 하되밑천까지 망가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는 말이다.
「보존」과 「보전」은 현재 국내에서 표준 번역어처럼 쓰이고 있지만 혼동하기 쉽다.한자어를 쓰기보다 우리 토박이말로 「지킴」과 「아낌」이라 하는 편이 더 이해가 쉽고도 정확할 것같다.
자연보호사상은 19세기 후반 산업혁명의 폐단이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유럽과 미국에서 널리 일어났다.그러나 20세기에들어와 두차례 세계대전을 겪는 동안,그리고 냉전의 초기까지 군비와 산업의 경쟁에 몰두한 강대국들은 환경문제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환경운동은 극소수 이상주의자들의 손에만 맡겨져 있었다. 72년에 큰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로마클럽의 보고서 『성장의 한계』가 나오고 스톡홀름에서 유엔환경회의가 열렸다.로마클럽 보고서는 여러나라 민간학자들의 노력을 모아 지구전체의 환경상황을 진단함으로써 국가주의의 질곡으로부터 환경문제를 풀어내는 열쇠가 됐다.스톡홀름회의 역시 환경문제의 국제화에 큰 고비가 됐다.선진국 지식층에 국한돼 있던 환경문제가 저개발국.개발도상국에까지 확장된 것이다.
뉴욕타임스 환경담당기자 필립 섀비코프가 세계환경 운동사를 개관한 『또 하나의 평화』(원제 A New Name for Peace.뉴잉글랜드대 출판부)가 나왔다.저자는 서문에서 자신이 학자가 아니라 저널리스트임을 천명하지만 상당히 치 밀하게 짜여진 이 책은 체계적 학문으로서의 역사가 일천한 이 분야에 하나의 개설서로 삼을 만한 책이다.
제목은 지난 67년 교황 바오로 6세의 교서에서 『개발이란 평화의 또하나 새로운 이름』이라 한 대목에서 따온 것이다.경제적.사회적.문화적 불평등을 극복함으로써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교황의 메시지를 저자는 최근 국제환경운동의 방향 으로 풀이한다.저자는 72년의 변화를 매우 중시한다.일부 지식층의 도덕적 문제제기에 그쳤던 환경운동이 전세계로 확장됐을 뿐아니라 사회 전계층이 참여하는 풀뿌리 운동이 됐다는 점,그로 인해 각국 정부가 독점해온 국제관계에서 민간기구가 큰 역할을 맡게된 점을 커다란 역사적 변화로 평가하는 것이다.
사실 유럽에서 근대민족국가가 형성된 이래 세계사의 흐름은 국가간의 대립과 경쟁의 특징을 보여왔다.그 경쟁은 현대 과학문명의 발달과 환경문제의 악화를 초래했다.환경문제가 심각하게 드러난 지금까지도 이에 대한 적절한 대응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경쟁의 논리다.그러나 지구의 환경파괴는 이제 세계인 공통의 문제며 그 대응을 통해 지구촌의 협력체계를 이루는 것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새로운 평화다.
국제환경운동의 주류가 「지킴」에서 「아낌」으로 옮겨지면서 선진산업국과 저개발국간의 관점이 접근의 길을 찾기 시작했다.지키는 자세가 도덕적 획일주의에 빠지기 쉬운 반면 아끼는 자세는 사회.경제적 요인들을 감안함으로써 선진산업국과 저 개발국간의 입장차이를 극복하는 대화의 폭을 넓힐수 있기 때문이다.
아끼는 환경운동은 한마디로 개량주의 성향이라 할 수 있다.환경문제의 근본원인을 따지는 데는 소극적 자세다.그러나 자본주의체제의 확장을 전제로 할때 이것이 역시 현실적인 관점일뿐 아니라 환경문제와 다른 사회경제 문제들을 관련시켜 준 다는 점에 그 실질적 가치가 있다.
스톡홀름에서 뿌려진 씨는 20년후 브라질의 리우에서 화려한 꽃을 피웠다.1백78개 국가에서 모인 7천명의 대표단 속에는 1백15명의 국가원수와 행정수반이 들어 있었다.1천4백여개 비정부간기구(NGO)에 속하는 2만명의 환경운동가들 이 모였고,9천명의 기자가 취재에 동원됐다.이 거대한 회의는 많은 숙제를풀지못한채 남겼지만 국제관계 속에서 환경운동을 새로운 위상에 올려 놓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꽃이 앞으로 맺을 열매에 대해서도 섀비코프는 적지않은 희망을 품고 있다.리우에서 한국은 가장 초라한 나라의 하나였다.
이 회의에 참석했던 최명모변호사는 당시를 회상하면 아직도 입맛이 쓰다.회의를 1년 이상 남겨두고부터 유엔이 민 간기구에 배포하는 참고자료를 각국 정부로 보냈으나 이것이 국내 환경운동단체에는 전달되지 않았다.두어달 전에야 다른 나라에서 그런 자료가 있음을 알고 정부에 질의하는등 우여곡절 끝에 일부 자료를 외무부에서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노동문제의 탄압이 노동부 소관이듯 환경운동의 억압이 환경부의본분이었던 것은 군사정권만의 특성이었을까.섀비코프의 책에서 한국이 환경운동 후진국의 예로 곳곳에 나타나는 것을 보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회원국으로서 한국의 환경정책 이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하다.문민정부는 달라져야 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염원하는 또 하나의 측면이다.
필립 섀비코프는 뉴욕타임스에 32년간 근무한 고참기자.초년에는 유럽과 아시아 각지에 체류했고 지난 14년동안에는 환경문제만을 담당해왔다.93년에는 미국환경운동사를 개관한 『녹색의 불길』(A Fierce Green Fire)을 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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