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아직은 바깥이 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황지우(1952~) '아직은 바깥이 있다' 전문

논에 물 넣는 모내기 철이
눈에 봄을 가득 채운다

흙바닥에 깔린 크다란 물거울 끝에
늙은 농부님, 발 담그고 서 있는데
붉은 저녁빛이 사선(斜線)으로 들어가는 마을,
묽은 논물에 입체(立體)로 내려와 있다

아,
아직은 저기에 바깥이 있다
저 바깥에 봄이 자운영꽃에 지체하고 있을 때

내 몸이 아직 여기 있어
아름다운 요놈의 한세상을 알아본다

보릿대 냉갈 옮기는 담양 들녘을
노릿노릿한 늦은 봄날, 차 몰고 휙 지나간 거지만



연보랏빛 자운영꽃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그 자욱한 슬픔을 보러 해질녘 들판에 나가 서성거리곤 한다. 아직 갈아엎지 않고 남긴, 논물이 들어오지 않은 자운영의 영토를 시인은 '바깥'이라 부른다. '바깥'이란 그렇게 스치듯 만나게 되는 또 하나의 세상일 뿐, 저 여린 꽃들도 곧 쟁기 끝에 부서져 한 줌 거름이 되리라.

나희덕<시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