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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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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몇 개월 전 『대한민국 원주민』이란 만화책을 본 적이 있다. 만화가 최규석이 자신의 가족을 직접 취재해 그린 것인데, 섬세하면서도 독특한 화법에 몇몇 대목에서 가슴이 먹먹해졌었다. ‘25년 만의 손님’도 그중의 하나다.

“엄마는 계란 볶음밥을 한가득 볶아주고는 문을 잠갔다. 유난히 역한 냄새가 나던 그 음식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울고 또 울었다….” 부모가 일하러 가기 위해 아이를 방에 가두고 나간다는 얘기를 접한 적은 있다. 하지만 잠시나마 그런 일을 경험한 ‘아이’가 세월이 흘러 이런 얘기를 직접 들려주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의 엄마는 ‘차마 발을 못 떼고’ 돌아왔고, 그는 우는 자신을 업고 생선 대야를 이고 숱한 고갯길을 넘은 엄마를 기억하고 있다. 어느 날 잠 못 이루던 새벽, 서른 한 살 성공한 만화가인 그에게 어린 시절의 기억이 갑자기 들이닥쳤단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불현듯 찾아온 ‘25년 만의 손님’을 만나 소리 내어 울었다고 했다.

그후에 읽은 공지영씨의 책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접했다. 그의 ‘위로 3부작’ 중 완결 편으로 꼽히는 지승호·공지영 대담집 『괜찮다, 다 괜찮다』에서다. 공씨는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틈틈이 ‘과거의 아이’, 즉 자신의 어린 자아를 찾아가 잘 달래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 아이에게 지금 어른이 된 내가 찾아가 안아주고 “괜찮다”고 위로의 말과 격려의 말을 듬뿍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비춰보면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의 저자인 조정육씨가 꼭 다시 만나 달래줘야 했던 이는 고교 시절의 자신이었던 것 같다. 최근에 출간된 『깊은 위로』에서 그는 아버지를 30년 동안 용서하지 못했다는 내용의 고백을 했다. 여고 시절 책가방이 너무 낡아 새 가방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매정한’ 아버지는 그의 앞에서 헌 책가방을 가위로 싹둑싹둑 자르고 천원짜리 지폐를 던졌단다. 그 뒤 “아버지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 30년 동안 가방을 자르고 있었다”고 한다. 조씨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마음속에 쌓아둔 것들을 털어내지 않으면 그게 병이 되고 한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며 자신은 “글을 쓰면서 자신의 상처를 바로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프랑스 주간지 ‘렉스프레스’ 창간인의 아들이며 의사인 다비드 세르방 슈레베르 박사는 『항암』이란 책에서 병을 이겨내기 위해 정신적인 상처를 치유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많은 사례를 들며 설명했다. 그 자신은 부유한 가정에서 “현대적인 육아 전문가와 분유의 손에” 맡겨져 자라 항상 어머니의 품을 애타게 그리워했다고 말했다.

흔히 하는 말처럼 누구나 상처 하나쯤은 가슴에 담고 살아간다. 우리가 ‘잘 살고 싶다’고 얘기할 때 그것은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꿀리지 않고, 상처를 덜 받는 건강한 삶을 의미한다. 마음이 아프다면 그 마음을 치유하는 데도 적극적이어야 한다. 앞서 말한 이들은 어린 시절의 자신과 당당히 마주하고 어두운 기억을 끄집어냈다. 자신이 처했던 상황과 대상을 이해하고 그 어두운 기억을 치유하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 이들이 만화를 그리거나, 글을 쓰는 에너지의 원천이 됐다. 그들이 쓴 책은 스스로를 치유하면서 다른 수많은 상처 받은 사람들까지 위로한다. 위로의 선순환이다.

최진실의 자살을 보면서, 성인은 물론 어린이와 청소년까지 우울증에 걸릴 정도로 마음이 아픈 사람들, 상처가 많은 사회를 다시 들여다보면서 우리는 자신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데 참 인색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혼자서 할 수 없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인식도 확산돼야 한다. 이제는 정신 건강을 삶의 질 테두리에서 생각해야 할 때다.

이은주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