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현 작가 "난 성질이 나빠 꽃미남 배우 캐스팅 못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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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꽃미남 배우들 캐스팅 않느냐고요? 나는 성질이 나빠서 대단한 분들 모셔가며 일할 수가 없어요.”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의 작가 김수현(65ㆍ사진)씨가 14일 서울 여의도 공원에서 열린 팬 미팅 자리에서 한 말이다. 김씨는 “장동건ㆍ현빈 같은 꽃미남 배우와 같이 작업할 계획은 없느냐”는 팬의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그는 “나랑 같이 일하려면 최소 일주일에 한번 이상 모여 대본 읽는 연습도 해야하고 나한테 이러저러한 지적도 받아야 한다”며 “일단 그분들이 함께 일하려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제작비를 털어 막대한 출연료를 주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며 “물론 장동건씨가 정말 출연료를 깎아가며 하고 싶다고 하면 거절할 이유는 없다”고 웃었다.

이날 행사는 제3회 서울드라마페스티벌에서 ‘2008 대한민국 대표작가’로 선정된 것을 기념한 자리였다. 그가 팬들 앞에 나서기는 처음이다. 200여 명의 팬이 모인 가운데 1시간여 동안 소탈한 대화가 오갔다. 창작활동 외에 가욋일에는 좀처럼 나서지 않기로 유명한 김씨가 모처럼 모습을 드러내자 팬들은 질문을 쏟아냈다. ‘대표작가’ 상을 받게 된 소감을 묻자 그는 “나는 상 받는 것도 이런 자리에 나서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오픈 행사라고 해서 나온 건데 알고 보니 속았다”며 웃었다.

안방극장에서 ‘언어의 연금술사’로 통하는 그에게 주옥같은 대사를 만들어내는 비법이 무엇이냐는 질문도 나왔다.
“저는 대사를 일부러 만들어 본 적이 없어요. 작업하다 보면 캐릭터마다 절로 튀어나오는 말을 잡아내 대사로 옮길 뿐이죠.”
“한번 써낸 대사는 흘려보낼 뿐 크게 머릿속에 담아두지 않는다”는 김씨에게도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을까. 그는 “드라마 ‘청춘의 덫’에서 심은하의 ‘당신 부숴버릴 거야’라는 대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망하게 만들 거야?’, ‘혼내줄 거야?’… 버림받은 여자의 복수심 어린 마음을 담아낼 말이 뭐가 있을까 싶어 한참 고민했다”고 말했다.

한 작가지망생은 불륜이나 출생의 비밀 같은 자극적인 코드가 가미되지 않은 ‘엄마가 뿔났다’가 큰 인기를 얻은 비결을 물었다. 김씨는 “나는 항상 단순한 주제로 작업을 한다”며 “그럼에도 내 드라마를 봐주는 분들이 제법 있는 이유는 아마 내가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를 잘 그려내기 때문인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는 “요즘 후배들의 시놉시스를 보면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라며 “자극적인 소재들을 한 작품에 털어 넣고 비빔밥을 만들어 놓는다고 시청률이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오랜 작가 생활 동안에도 이야기 샘이 마르지 않는 까닭을 묻자 “나도 늘 쓸게 없다고 생각한다”라며 “특별하고 희한한 것이 아닌 우리들의 일상을 하나씩 끄집어내 쓰니까 소재가 고갈될 일이 없는 것 같다”라고 답했다.

“요즘 드라마의 절반은 중학생이 만든 습작 수준”이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그가 즐겨보는 작품도 있을까. 그는 “‘베토벤 바이러스’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라며 “열심히 만든 좋은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아끼는 배우들에 대한 솔직한 마음도 드러냈다. 특히 2001년 청소년 성매매혐의로 구속된 후 방송 활동을 중단해온 배우 이경영에 대한 안타까움을 밝혔다. 그는 “오늘 이 자리에 나오며 문득 이경영이라는 배우가 너무 오랫동안 쉰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논란이 될 수도 있지만 이제 일을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또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의 잘못에 대해 잔혹하게 매도하는 편인데 좀 용서하고 편안하게 일할 수 있게 해야 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1968년에 데뷔해 한국 드라마와 궤를 같이해 온 그는 후배들에게 따끔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작가협회 회원이 1000명이 넘지만 그 중에 진정한 작가는 몇이나 될까요. 좋은 작가가 되려면 시청률, 원고료에 관심을 끄세요. 알뜰한 작품을 만들어내면 그 외에 것들은 저절로 따라오는 겁니다.”
그는 “‘김수현 같은 작가가 되겠다’라는 지망생들을 많이 보았다. 하지만, 김수현만큼 비싼 고료를 받고 싶어할 뿐 나만큼 열심히 작품을 쓰겠다는 열정은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이런 말하면 또 욕먹겠다. 안티 백만 명 양산하겠다”라고 너스레를 떨어 객석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드라마의 오락성을 무시할 수 없지만 저는 40년 동안 드라마를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만들어왔어요. 죽을 때까지 저는 그런 자부심을 가지고 작품을 써낼 거에요. 앞으로 그런 후배가 늘어나 저도 즐겁게 시청할 수 있는 작품이 많이 나오길 바랍니다”

이에스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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