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러 수교 120주년…평화 실은 한국 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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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간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1만5000여 관중은 서태지의 음악에 환호를 연발했다. [사진 제공=서태지 컴퍼니]

▶ 공연장에 들어가지 못한 이들이 항의 소동을 벌일 정도로 서태지 공연은 인기를 모았다.

지난 8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한.러 수교 120주년''러시아 한인 이주 140주년'을 맞아 서태지의 첫 해외 공연이 열렸다. 이날 오후 7시, 공연장인 디나모 스타디움에 도착하자 수많은 시민이 몰려 주변은 이미 차량이 통제되고 있었다. 서태지 일행은 경찰 1500명의 경호 속에 30분 뒤 입장을 마쳤다. 가로.세로 57m, 높이 12m로 만든 정사각형 모양의 화려한 특설 무대 양 옆에는 실황을 중계할 두 대의 대형 스크린이 설치돼 있었다.

오후 7시45분에 시작된 공연은 어둠이 짙어가는 가운데 9시40분 서태지가 등장하면서 절정을 맞았다. 무대 맨 앞에는 서울에서 온 열성 팬 600여명이 포진해 이날의 주인공을 반겼다. 이른바 '오빠 부대'. 이들은 후원사인 KT&G를 통해 53대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됐다. 지난 6일 오후 5시 강원도 속초항에서 유람선을 타고 20여 시간의 항해 끝에 블라디보스토크항에 도착하는 열정을 과시했다.

서태지는 4집에 실린 '1996,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를 시작으로 최근 펴낸 7집 수록곡 'Heffy End''로보트'를 잇따라 부르며 한국 록의 존재를 러시아에 처음으로 소개했다. 네번째 곡 '인터넷 전쟁'(6집)을 부를 땐 여섯 개의 불기둥을 사용한 특수효과가 연출되는 가운데, 1만5000여 관중들은 서태지의 목소리 톤이 높아질 때마다 그에 맞춰 같이 함성을 질렀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는 조금 춥지만 오히려 추워서 좋은 것 같아요"라고 인사했다. 한국의 늦가을 날씨에 바람까지 불어 두꺼운 외투가 필요할 정도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현장을 떠나지 않는 청중을 배려한 말이었다.

'Take1'(5집), '필승'(4집), '시대유감'(4집)과 7집에 실린 신곡 중 방송 3사의 금지곡이 된 'F. M 비즈니스'와 'Victim'을 부른 그는 잠시 무대 뒤로 사라졌다가 곧 이어 앙코르송으로 'Take5'(5집), 'Live Wire'(7집)를 부른 뒤 축제를 마무리 지었다. 어둠이 완전히 깔린 10시40분, 갑자기 무대 옆에서 쏘아 올린 60여발의 '깜짝 불꽃놀이 쇼'가 피날레를 장식했다.

이날 공연의 주제는 '경계선을 넘어, 큰 울림을 알리러'. "결박되어 버린 기억 속에/ 잊혀져 버린 이 큰 울림을 알리러/ 난 오늘 경계선을 넘을게/ …향긋한 바람과 함께 쿠데탈 외쳐/ 내 열두 개 멜로디로/ 난 오늘 경계선을 넘을게"('LIVE WIRE'중)에서 따온 슬로건이다. 주최 측은 "동북아 평화와 번영을 기원하고 양국 젊은이들의 축제로 승화시키려는 의도"라고 했다.

서태지는 자유를 노래하고 싶은 듯했다. 그가 꿈꾸는 자유의 의미를 러시아 관객들은 대형 스크린에 나오는 '전쟁은 그만(No More War)''살인은 그만(No More Murder)' 등의 문구를 통해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무엇보다 사운드의 리듬 그 자체를 즐기는 듯했다. 그리고 서태지의 한마디 한마디에 자지러질 듯 고성을 뿜어내고 두 손을 치켜들어 좌우로 흔들며 열광하게 하는 서태지의 무기는 오로지 멜로디뿐이었다.

서태지에 앞서 블라디보스토크 현지의 인기 밴드 MBK가 가장 먼저 무대에 올라 분위기를 잡았다. 이어 한국의 록 그룹 '넬'과 '피아'가 차례로 등장했다. 다소 부드러운 록 음악을 선보인 넬의 공연에 객석은 호흡을 가다듬는 듯했고, 곧이어 강렬한 사운드의 피아가 파워 넘치는 목소리를 토해내자 객석의 몸놀림이 빨라지고 함성의 톤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일부 관중은 이때부터 추위도 아랑곳않고 웃옷을 벗어 맨몸을 노출시키기 시작했고, 일부 커플은 연인을 무동태우기도 했다.

블라디보스토크=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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