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예찬? 아니, 걷기 예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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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홀릭의 꼭지 ‘탐험가를 탐험하다’ 초기 필자였으며 현재는 일러스트를 그리는 이시원 씨는 뉴욕에 거주한다. 말 그대로, 뉴요커다. 한국에서 태어나 칠레에서 이민생활을 했으며 다시 한국을 거쳐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조금 더 거창하게 ‘세계 시민’이라고 말하는 건 어떨까. 이시원 씨는 최근에는 뉴욕의 풍경을 그린 그림들을 모아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이시원 씨는 워크홀릭과 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여러 차례 교신했다. 교신의 99%는 걷기 예찬이었다. 그것을 옮겨 놓는다.

나는 뉴욕을 그리는 사람 나는 대학(스쿨 오브 비주얼아트 School of Visual Arts)에서 영화 애니메이션을 전공했고, 현재는 아트디렉팅, 디자인, 일러스트 등의 작업을 주로 하고 있다. 한국의 대학원에서 문화콘텐츠를 전공하고 잠시 아트디렉터로 일한 적이 있는데, 그 이력 탓인지 자꾸 그런 일과 연이 닿는다. 최근에는 글래스 페인팅까지 했다.

개인적으로는 홈페이지에 뉴욕의 거리 풍경을 스케치하거나 글로 쓰는 작업을 꾸준하게 진행하는 중이다. 벌써 5년 쯤 된 것 같다. 최근에 하는 작업 중에서 거리를 걸으며 뉴욕의 여러 가지 면모들을 스케치한 것들이 있는데, 9월 25일부터 10월 초까지 이것으로 올 가을에 전시회 열기도 했다. 거리 위에서 관찰하는 그들의 삶, 일상적인 풍경들을 소개하는 기회였다. 도시의 특성상 뉴요커들은 워크홀릭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워낙 도로가 좁고 차가 많다보니 자동차를 이용하는 것보다 부지런히 걷는 게 뉴요커의 정신건강에 더 이롭다.


내가 뉴욕을 꼼꼼하게 들여다 보게 된 것은 지도 작업 때문이다. 브룩클린, 퀸즈, 스태이튼 아일랜드, 뉴저지 등의 구역을 나누어서 지도를 그리는 작업을 한 적이 있다. 뉴욕의 도시 생활이 얼마나 다양한 색깔을 지니고 있는지 직접적으로 체험하게 된 계기였다. 한국에서도 뉴욕을 여행한 사람들이 많지만, 거의 비슷비슷한 이미지만을 소비하고 돌아간다. 뉴욕은 그야말로 다양성의 집결지라고 할 만한데, 안타까운 일이다. 내가 그리는 뉴욕 지도, 혹은 내가 그리는 뉴욕 풍경이 뉴욕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가능하게 만드는 작업이길 바란다.

뉴요커가 되는 진짜 조건은 워크홀릭 뉴욕의 거의 모든 거리와 장소, 인상적이거나 특별한 곳들은 거의 다 내 머릿속에 들어 와 있다.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서 부지런히 이곳 저곳 돌아다녔고,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전달할지 늘 고민했다.


최근에 재미있는 경험을 하게 됐는데, 한국에 다녀온 뒤로 내게 익숙했던 뉴욕이 완전히 새로워 보였다. 그전에는 무심히 넘겼던 아주 일상적인 공간이 특별하게 다가온 것이다. 친구를 만날 때면 늘 이용하던 아지트나 혼자 글을 읽고 그림을 그리던 브룩클린의 작은 단골 까페, 팝콘 냄새가 아니라 커피 향기 가득한 정말 작은 영화관, 겉으로 보기에는 정체가 불분명해서 잘 아는 사람들만 단골이 되어 찾는 작은 바, 편하게 눌러앉아 커피 마시며 책을 볼 수 있는 서점, 이런 것들이 설레는 공간이 된 것이다. 하루 날을 잡아서, 내게 익숙한 바로 그곳들을 순례하다 보면 내가 호흡하는 공기까지 남다르게 느껴진다.

정말 단언컨대, 뉴욕을 가장 잘 즐기는 방법은, 여행객들이 으레 들르는 관광명소를 찾거나 쇼핑을 하는 게 아니라, 그저 걷는 것이다. 공간을 이미지로 소비하는 게 아니라 공간의 리얼리티를 체험하고 완성하려 한다면 걷기가 최선의 방법인 것 같다. 영화나 드라마 속에 나오는 뉴욕과 내가 걷는 뉴욕이 판이할 수도 있다. 그럴 때, 진짜 뉴욕은 바로 후자다. 나는 운이 좋아 여러 나라 여러 도시에서 살 수 있었는데, 뉴욕만큼 다양한 색깔을 조화롭게 간직하고 있는 도시가 없는 것 같다. 이번 가을에 뉴욕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워크홀릭 독자들이 있다면 편한 신발을 가장 먼저 챙기라고 말하고 싶다.

워크홀릭 담당기자 설은영 enyoung@joongang.co.kr

2008.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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