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효봉 스님 추모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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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부처가 득도(得道)한 뒤 전도를 위해 바라나시로부터 갠지스강의 남쪽을 건너 마가다국으로 향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잠시 휴식을 취할 겸 길에서 좀 떨어진 숲속으로 들어가 한 거목 아래에서 좌선하고 있던 중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그 고장의 부유층 자제 30명이 아내를 데리고 놀이를 나왔는데 소동이 벌어진 것이다.사연인즉 그중 독신이었던 한 청년을 따라온 기생이 여러 사람의 값진 패물을 챙겨 달아났다는 것이었다.청년들이 사연을 말하고 기생의 행방을 묻자 부처 는 미소를머금고 이렇게 되물었다.
『여자를 찾는 일과 자기자신을 찾는 일은 과연 어느 쪽이 더중요하겠는가.』 청년들은 이구동성으로 그야 자기자신을 찾는 일이 더 중요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다.그제서야 부처는 젊은이들을앉혀놓고 설법을 시작해 모두 제자로 만들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자기자신을 찾는 일」을 참사람이 되는 출발점으로 본다.35세의 이찬형(李燦亨)판사가 자기자신을 찾게 된 것은 어떤 형사사건의 피고인에게 내린 사형선고가 계기였다.
자료와 증거에 의해 사형선고를 내린 다음 李판사는 깊은 회의와절망속에 빠져들었다.『산다는 것은 무엇이고,죽는다는 것은 무엇이며,도대체 저 사형수와 나와의 인과(因果)는 무엇인가』하는 끊임없는 의문들이 그를 괴롭혔다.
마침내 그는 법복을 벗어던지고 엿판 하나만을 어깨에 둘러멘 채 방랑의 길에 올랐다.3년동안 고행의 기쁨을 만끽하면서 그는「살아도 산 것이 아니요,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다(生不生 死不死)」는 진리를 깨달았다.그는 그 길로 「금강산 도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석두(石頭)스님을 찾아가 계(戒)를 받고 법명 학눌(學訥),법호 효봉(曉峰)의 스님이 된다.38세의 늦은 출가였다. 66년10월15일 아침 단정히 앉아 『무(無)라,무라』고 중얼거리며 입적하기까지 효봉스님은 모든 불자와 신도들의 정신적 지주였다.분명 그는 선승(禪僧)이었지만 총무원장.종회의장.종정을 맡는 등 일선에서 교계정화에도 앞장섰다.열반 30주기를 맞아 송광사의 서울 분원인 법련사는 9일부터 23일까지 사찰내 불일미술관에서 대규모 추모전을 갖는다.효봉스님의 체취가 물씬 배어 있는 유품과 붓글씨.족자등이 생전의 발자취를 되새기게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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