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농부가 된 교사아버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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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창문을 여니 하늘은 드높고 딸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가 시야에 가까이 들어온다.꼭두각시 음악이 경쾌한 것을 보아 가을운동회가 멀지 않았나보다.지난해 이맘때 마지막 운동회를 아쉬워하며혼신의 힘을 다해 운동회를 치르셨던 아버지의 구 령소리가 쩌렁쩌렁 메아리쳐 들려오는 것같다.아버지는 96학년도 1학기를 마지막으로 얼마전 초등학교 교직을 정년퇴임하셨다.머리가 희끗한 제자부터 딸 또래 제자까지,대를 이은 제자들에게서 기념패와 꽃다발을 한아름씩 받으시면서 만감의 눈 시울을 붉히시던 나의 자랑스런 아버지.그런데 어쩌자고 여지껏 나는 아버지를 제대로 자랑스러워하지 않았을까.『나라에서 국민훈장 동백장까지 주면서 이제 편히 쉬라고 합니다.그렇지만 쉬어보지 않아 어떻게 쉬는 것인지 잘 모르겠으니 큰일입 니다.』 아버지 특유의 유머러스한 표정과 위트로 퇴임사를 시작하셨지만 그 심연에는 얼마나 깊은 심회가 내재하고 있는지를 나는 잘 안다.앞으로 길에서 책가방 멘 어린이만 봐도 눈물이 날 것같다고 하셨는데 지금쯤 어린이 대신 누굴 쓰다듬고 계 실까.혹 낮술을 드시는 것은 아닌지.전화기를 들었다.생각과 다르게 예의 그 씩씩한 음성이 나를 몹시반갑게 했다.『응,밭에 나가는 길이여.종필 아버지가 트랙터와 닭똥 가지고 밭에 나온다고 했으니,아버지 바빠서 이만 끊는다.
들어가라.』물 고기가 물을 떠난 듯 시름시름 하실줄 알았는데 웬 닭똥? 읍내 입구에 2백평 남짓 밭을 도지 얻으셨다더니 이제 농부로 정식 입문하시려나 보다.65세.농부로선 아직 청년으로 대접받는 젊은 나이에 아주 건강하게 지금 학교운동장 대신 밭 에서 밑거름을 뿌리고 계실 아버지.항상 건강한 삶을 취하시는 아버지가 너무 감사해 뭉클한 가슴이 울컥 쏟아진다.
최희정 경기도의왕시오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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