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오노나나미와의대화>2.경제력이 문명을 낳고 유지시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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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오노 나나미는 우리 신문에 실을 그의 사진을 고대 로마와 인연 있는 곳에서 찍고 싶다고 요청하자 단번에 포로 로마노를 지적했다.그 속을 거닐다 내가 물었다.
『여기 있던 수많은 굉장한 건물들이 이렇게 폐허가 된 까닭은게르만 야만인들이 파괴한 탓인가요.』 로마제국은 지금부터 1천5백년쯤 전에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멸망했다.게르만은 다름아닌 지금 서유럽의 문명을 이룩한 민족이다.독일.프랑스.영국등.시오노는 로마를 침입한 것은 게르만 야만족임에 틀림없으나 포로 로마노를 위시한 고대 로마 문화유산이 황폐하게 된 것이 그들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대답한다.
『어느 나라나 말기가 되면 돈이 모자라게 됩니다.이러한 거대한 시설은 건설할 때도 엄청난 돈이 들지만 유지하는 데도 (건설비에) 못지않은 돈이 듭니다.뿐만 아니라 정치 부문은 문화재를 관리하겠다는 의지도 능력도 잃게 됩니다.지금은 낡은 유적이라서 건물의 돌 모양은 1천5백년 동안의 비바람에 둥그레졌고,돌들 사이에 그래서 생긴 틈에는 흙먼지가 끼어들어 군데군데 나무와 풀이 이렇게 자라게 되었지요.본래의 이들 돌 모양은 모서리가 반듯반듯했고 서로 이가 꽉꽉 맞 았기 때문에 흙이 끼어들틈이 없었어요.이곳에 있는 고대 로마 유적은 그러니까 제정 로마 말기부터 이미 서서히 메인트넌스(관리) 부족으로 무너져 오고 있는 것입니다.굳이 누가 파괴한 것은 아닌 셈이지요.』 문명을 건설하고 유지하는 것은 경제력이다.한 나라는 말기가 됐기때문에 돈이 떨어지는 것일까,돈이 떨어지면 말기가 되는 것일까.혹시 돈은 있는데도 그것을 공공(公共)목적을 위해 거두고 사용하는 정치력에 문제가 생김으로써 말기 증상 이 시작되는 것일까. 현대 이탈리아 통일기념관이 있는 이편 쪽으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을 지금 수리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내가 말했다. 『현재의 이탈리아 정부는 저것을 수리할 돈이 충분히 있는 모양이군요.』 시오노가 말을 받는다.
『이탈리아 정부는 예산은 부족한데 수리할 고적은 너무 많아 고민입니다.유네스코의 조사에 따르면 전인류의 문화유산 가운데 60%가 이곳에 집중돼 있다고 하니까요.』 그러나 이탈리아에 고대와 르네상스의 유적은 「가난한 집 제사 돌아오듯」이라고 비유할 만큼 짐덩어리는 결코 아니다.
지금의 로마 시내에는 스페인 광장을 중심으로 세계에서 유례가없는 큰 패션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백화점 규모의 대형 상점은보이지 않고 모두가 부티크 형태의 소규모 가게다.상점들의 이름은 곧 세계적으로 이름난 자기네들의 상표와 일 치한다.대체로 몇 백년은 된 엄청나게 낡은 건물이지만 지면층 하나만은 조명과진열 재치를 실력있는 대로 다 부려서 세계 최고급 디자인 상품임이 잘 드러나게 한 옷.구두.가방.안경.가구.신변액세서리 제품이 쇼윈도를 건너가며 이어져 있 다.
로마 사람들은 조상이 남긴 유적을 잘도 이용하고 있다.무엇으로?재주와 근면으로.고대 로마의 문화유적을 관광하러 와서 사람들은 현대 이탈리아의 패션제품을 쇼핑하는데 지갑과 정열을 아마도 훨씬 더 소모하는 것 같다.
여기서 떨어지는 정부 수입으로 이탈리아 정부는 고대 로마 유적을 조금씩 수리하고 복원해 갈 수 있을 것이다.파괴되거나 일실(逸失)한 부분은 새로 만들어 끼울 수 있을 것이다.
시오노는 이중국적에 대해 끈질기게 의견을 펴고 싶은 모양이다. 『재일 한국인에게 일본이 한국과 일본의 이중국적을 허용한다는 것은 일본인을 위해서도 그 이상 더 좋은 자극이 없을 것입니다.문화나 문명은 이전과 똑 같이 늘상 남아 있다가는 새로운것이 절대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다른 것이 들어와 서로 섞여야새로운 문화가 태어날 수 있게 되지요.그리스의 경우도 그랬습니다마는 항구 도시가 새로운 문화의 탄생지가 되는 까닭은 이 이유 때문입니다.배를 타고 여러가지 이질적인 문화가 들어오는 곳이 항구지요.
현대는 비행기와 하이테크 시대이므로 항구라는 개념을 고정하기가 어렵습니다.이제는 국토 전체가 항구지요.현대 이탈리아에서도약 10년 전에 영국과 이탈리아 두개의 국적을 가진 사람이 재무장관으로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지금은 007시 대가 아닙니다.단지 공직(公職)에 취임하게 되면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의 법률을 준수하고 그 나라의 이익을 위한 일을 하면 되지요.』 내가 그의 국적을 물었다.
『저는 일본 국적을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제 아들은 이탈리아 국적입니다.일본의 법률은 이중국적을 스무살 때까지만 인정합니다.아들은 20세가 되던 해 일본 국적이나 이탈리아 국적 가운데 한가지를 선택해야 했지요.그런데 일본 사람들 이란(이 말을 하는 부분에서 그는 실소를 짓는다) 일본에 대해 잘 아는 외국인에게는 매우 친절합니다.그렇지만 외국인으로서 일본인이 된사람에게는 저항감을 가집니다.그래서 제 아들의 경우 일본을 잘아는 이탈리아 사람으로 남아 있는 편이 유리하다고 저는 판단한거지요.아마도 걔가 일본의 공직을 가지게 될 일은 거의 없다고본 것도 일본 국적을 선택하지 않은 한 이유였어요.』 ***나는 그의 아들을 만날 기회를 가지지 못 했다.그러나 일본인 어머니와 이탈리아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잘 생긴 혼혈아를 상상할 수는 있었다.시오노는 이런 자기 아들이 일본 국적을 가지게되면 만날지도 모르는 고국 동포로부터의 편협한 저항감을 절실하게 고려했으리라.
시오노는 조금 전까지 저항감이라고 얼버무려 부르던 것을 차별이란 분명한 용어를 쓰면서 말한다.
***성공한 사람 差別 못느껴 『인간이란 것은 아무 일 없이잘 지내고 있으면 차별이란 것이 없다고 느낍니다.일본에서 성공한 재일 한국인들은 차별이 없다고 여기겠지요.그러나 성공하지 못한 재일 한국인은 차별 때문에 자기들이 성공하지 못했다고 말할 것입니다.이런 기분은 매우 당연한 것입니다.미국의 흑인들도성공한 사람들은 차별 따위는 없다고 느끼지요.』 이 대목에서 나는 그가 역사도 잘 알지만 인간의 본성에 관해서는 더 잘 알고 있다는 말로 그를 추켜세웠다.
그는 여성에 관한 비유로 말을 옮겨 간다.
『좀 웃자고 하는 얘깁니다마는 스스로 해방된 여성이라고 말하는 여자는 무언가 진척이 잘 안 되고 있는 여성이라고 보면 됩니다.그러나 이 세상에는 잘 안 되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지요.이 사람들이 여론을 만듭니다.이런 여론이 큰 목 소리가 돼 나오지 않도록 불행한 사람들에게 기회를 평등하게 주는 것이 정치가 할 일이지요.고대 로마의 정치는 이런 튼튼한 철학을 가지고 이루어졌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 그대로 시오노의 이야기는 끝까지 들어 보면 시간을 거슬러 흘러 모두 고대 로마로 향하고 있다.
로마에서 강위석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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