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 쓴 권력, 발가벗겨진 개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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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대학을 나왔건만 복사 가게 점원으로 일하면서 도박으로 소일하는 청년 제리(샤이아 라보프). 빈털터리인 그의 계좌에 어느 날 거액이 송금되고, 집에 와보니 무시무시한 무기들이 배달돼 있다. 무슨 일인지 파악할 새도 없이, 낯선 여자가 휴대전화를 걸어와 ‘FBI가 곧 들이닥친다’고 알려준다. 정말 곧바로 FBI가 들이닥치고 제리는 테러용의자로 붙잡힌다. 그런데 낯선 여자의 목소리는 상상도 못할 대담한 방법으로 FBI 사무실에서 제리를 탈출시킨다.

같은 시각, 어린 아들을 혼자 키우는 레이첼(미셸 모나한)에게도 꼭 같은 목소리가 지령을 내린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학생연주회에 참석하러 간 아들이 위험하다는 협박과 함께다. 서로 모르는 사이였던 레이첼과 제리는 졸지에 동료가 되어 영문도 모르고 꼼짝없이 낯선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모종의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이글 아이’의 전반부는 강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스릴러적 구성과 적절한 액션으로 마치 관객의 혼을 빼놓을 듯 시작한다. 하지만 두 주인공을 조종하는 세력의 정체가 영화 중반부쯤 드러나고 나면, 맥이 풀린다.

낯선 목소리의 정체는 거대한 감시권력이다. 휴대전화·팩스·교통신호는 물론이고 길거리 전광판 광고까지 마음대로 조작하고, 두 주인공의 행동을 24시간 곁에서 지켜보는 듯 감시한다. 전 지구적 감시권력이 정보화 사회와 결합됐을 때의 악몽이라면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1998년) 같은 빼어난 영화들이 있었으니, 이 영화를 새롭다고 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이글 아이’의 권력은 너무도 완벽한 능력을 갖춘 존재로 등장한다.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두 주인공의 분투에서 상대적으로 인간적 재미가 덜 느껴지는 이유다. 시간 죽이기용 오락영화로는 나쁘지 않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편이 낫다.

국외자의 눈에 이 영화가 흥미로운 점은 따로 있다. 이른바 9·11테러 이후 미국사회의 경험을 할리우드 오락영화가 수용하는 방식이다. 제리와 레이첼의 행보는 평범한 시민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도무지 빠져나갈 수 없는 감시·협박에 몰려 테러의 조력자가 될 수도 있다는 잠재적 두려움을 자극한다.

첫머리에 등장하는 미군의 오폭사건은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 이후 미국 정부의 대내외 정책을 떠올리게 한다. 불확실한 정보를 바탕으로, 정책 결정자들이 내린 무리한 판단이 불러온 비극이 이 영화의 출발점이다. 평범하게만 보였던 두 주인공은 거대한 권력이 용의주도한 사전계획 아래 선택한 최적의 인물이라는 것이 점차 드러난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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