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공정위가 나설 때가 아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공정거래위원회가 재벌계 금융사의 타(他)계열사 의결권 축소, 출자총액 규제, 지주회사 규제 강화 등을 골자로 한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입법예고 했다. 기업의 경영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다. 우리는 그러한 조치들 자체를 반대하기보다 과연 지금이 적기(適期)인가라는 점을 묻고 싶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고 바람직한 일도 때가 아니면 오히려 해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지금 같은 장기 불황 가운데 투자와 소비가 죽고 일자리가 없어 쩔쩔매는 현실에서 기업의 활동을 위축시키고 손발을 묶는 규제를 강화하는 게 과연 잘하는 일인가 하는 문제다.

공정위는 재벌계 금융사의 타계열사 의결권을 낮추고, 궁극적으로 없앤다는 입장이다. 고객 돈으로 지배주주의 영향력을 높이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원칙은 맞다. 그러나 현재 많은 대기업은 외국인 지분이 50%를 넘으면서 적대적 인수.합병(M&A)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 국내 대표기업의 경영권이 헐값에 외국 자본에 넘어갈 수도 있다. 이런 판에 의결권 범위를 바로, 대폭 줄이겠다는 것은 현실을 무시한 위험한 발상이다. 원칙은 좋지만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출자총액 규제는 과도한 기업 확장을 막는다는 좋은 의도와 달리 투자를 위축시키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산업은행 조사 결과 제조업체들은 돈은 엄청 벌지만 빚 갚거나 현금으로 쌓아놓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돈 있어도 투자를 안 한다는 재계 주장이 사실로 입증된 것이다. 출자총액제한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이를 유지하는 게 옳은지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

대기업의 방만한 경영과 불법 행위에는 감시와 감독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이중 삼중의 규제만 높인다고 될 일도 아니다. 시장 여건과 기업 환경도 많이 달라졌다. 공정위도 달라져야 한다. 국가 경제라는 큰 틀에서 이런 문제들에 접근해야 한다. 같은 행정부 안에서도 왜 재정경제부가 공정위 계획을 반대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