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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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고교수의 안을 택하기로 했다.고대서부터 우리 문화가 일본에 건너간 사실을 증명하게 될 중요한 수수께끼 풀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글을 써낼 필자가 있을까요?』 한국사도알아야 하고,일본사에도 환해야 하고,역사관이 올바로 서 있어야하고….마땅한 이가 찾아질지 알 수 없다.
『켄트교수는 어떨까요?』 느닷없는 고교수의 제의에 을희는 놀랐다. 『켄트교수의 전공은 영어사(英語史)가 아닙니까?』 『그새 줄곧 한.일비교고대사 연구를 해오셨어요.』 포도주를 스스로덧따르며 고교수는 설명을 달았다.
『영어사 연구는 필연적으로 잉글랜드로 흘러든 불어나 독일어,프랑스문화나 독일문화의 영향을 전제로 하지요.대륙의 문화가 섬으로 옮겨지면 아름답게 꽃핀다고 한 것은 토인비였습니다.그 보기로 영국문화를 꼽았는데,켄트교수는 일본문화의 경 우도 매한가지라면서 한.일비교고대사 연구를 해오신 겁니다.』 켄트교수-.
을희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그의 새 연구의 바닥에한국에 대한 살뜰함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한국전에서 치명적인 상해(傷害)를 입은 이의 한국 사랑.그 집착이 을희를 슬프게 했다.그가 보고 싶었다.
『그분이 써주실까요?』 『안 쓰실 이유는 없지요.그래도 간곡히 부탁드려야 할 겁니다.연구논문은 더러 써오셨지만 일반 독자를 위한 글은 한번도 쓰신 적이 없으니까요.서사장이 직접 가뵙고 청탁해 보시면 어떨까요?』 『제가요? 보스턴에 가서 말입니까?』 『물론이지요.그분이 한국에 오실 순 없잖습니까.』 『만나주실까요? 아무도 안 만나신다던데요?』 『내가 청을 드려보지요.만약 연휴를 끼고 출장 가신다면 서사장 가방을 들고 가드릴수도 있습니다.』 고교수가 호탕하게 웃었다.
『정말이십니까?』 켄트교수를 만나러 고교수와 함께 미국 갈 계획을 구체적으로 짠 것은 그 이튿날이었다.퇴근시간이 되자 구실장이 하얀 봉투한 장을 들고 와서 을희 책상 위에 조용히 내밀었다. 「사직원(辭職願)」이라는 글씨가 눈에 시렸다.
『이게 뭐예요?』 나무라듯한 물음에 고개 숙이고 있던 구실장이 입을 열었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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