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자로가는길>경북김천 수도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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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암자의 수명을 결정짓는 요인중 하나가 샘의 수량(水量)이다.
잘 나오던 물이 마르게 되면 결국 암자도 어느 때인가는 폐사돼버리고 말기 때문이다.신라 헌안왕 3년(859년)에 도선국사가창건한 수도암의 물도 마찬가지다.해발1천의 고지 에 샘이 있지만 1천1백년동안 단 하루도 마른 적이 없다고 하니 그냥 물이아니라 생명수(生命水)라는 느낌이다.
그러니 암자는 수도승들이 끊이지 않고 번창할 수밖에.풍수와 선(禪)을 한 맥락으로 보고자 했던 도선국사도 이 암자터를 발견하고는 너무 좋아 1주일동안이나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하니명당임에 틀림없을 것같다.수도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터가 없을것이라며 암자를 수도암이라고 명명한 것을 보면 도선국사의 심정을 이해할 만하지 않은가.암자에서 바라보면 멀리 파도처럼 한줄기 능선이 지나가는데,수도암은 덕유산과 가야산의 중간 지점에 등대처럼 자리하고 있다.수도암의 특산물인 아침 안개가 걷히고 나면 해는 가야산 쪽에서 불끈 치솟아 오르고.
『우리 수도암은 세 시대의 새 부처님을 함께 모시고 있지요.
대웅전의 신라 부처님,약광전의 고려 부처님,나한전의 조선 부처님이 바로 그렇습니다.이런 특이한 암자를 다른 데서 보신 적이있습니까.』 정진하는 스님들을 뒷바라지 하는 원철(圓徹)스님의자랑이다.
『나한전에 나한(羅漢)을 모신 것은 무학대사가 권유하고,이성계가 지시를 해서 그랬다고 합니다.이때부터 나한전이 유행했다는일설도 있고요.』 대적광전(大寂光殿)을 들어가 보물 제307호로 지정된 비로자나(毘盧遮那)돌부처님을 뵌다.과연 돌부처님에게도 통일신라의 위풍이 서려있음이 느껴진다.얼굴에는 위엄이 서려있고,어깨는 건륜성왕처럼 당당한 것이다.뿐만 아니라 약광전(藥光殿 )에도 들러 약사여래(藥師如來)돌부처님(보물 제296호)을 친견한다.약사여래란 요즘으로 치자면 무료로 병을 고쳐주는 고마운 의사다.그래서인지 대적광전의 부처님보다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같다.통일신라의 기세등등함이 사라지고,고려초기인 10세기께의 평온함이 단아하게 스며있음이다.
이윽고 계단을 내려와 나한전을 들르니 고려왕조를 무너뜨린 태조 이성계가 문득 떠오른다.새로운 왕조를 보전하기 위해 수도암의 나한은 물론 심심산골의 나한까지 동원한 그의 집념이 얼마나깊었는지 짐작이 가는 것이다.그의 그런 처세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비록 무장(武將)이었으나 원한을 사는 칼에만 의지하지 않고,덕(德)을 키우는 종교의 힘까지 끌어들인 것이다.그런 마음이 바로 5백년 조선의 든든한 머릿돌이 되지 않았을까.
경북김천시증산면 청암사 입구에서 수도리 가는 길로 1시간쯤 걸으면 암자에 이른다.암자까지 승용차가 오르도록 길이 나 있다. 글=정찬주〈소설가〉 사진=김홍희〈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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