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정책과 政爭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미국의 정치와 일본의 정치를 비교해 논할 때 흔히 미국은 정책이,일본은 정쟁(政爭)이 더 권력경쟁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들을 한다.대통령제와 내각제라는 제도의 차이와 각기 생성과정이 다른 정치문화의 특성등을 감안한 지적이다.
미국의 고급 투자정보지(誌) 『바론스』는 최근호에 관계전문가들을 동원,2차 세계대전후 미국 대통령선거와 경기순환의 관계를분석했다.고용창출.실질소득.주가.물가.장기금리.재정적자.국민총생산등 일곱가지 지수를 기준으로 역대 대통령들의 경제운영능력을채점한 이 분석에 의하면 최악의 3인은 카터.포드.부시고,최상의 3인은 트루먼.케네디.클린턴이다.
최악의 3인은 모두 재선에 실패했는데 카터는 물가를 못 잡은것이,포드는 주가를 떨어뜨린 것이,부시는 고용창출을 못 한 것이 가장 큰 패인이었다.부시처럼 걸프전때 90%의 지지를 받았던 대통령에게도 실업률이 급증하면 가차없이 등을 돌리는 것이 미국 국민들이며,경제정책에 실패하고도 재선한 대통령은 한명도 없다고 결론짓고 있다.
반대로 외교정책의 부분적 실패,스캔들 등으로 적잖이 실점한 대통령도 경제정책의 실적이 월등하면 무난히 재선돼 왔다는 점에서 클린턴 대통령의 재선가능성을 높게 점치고 있다.클린턴은 주택융자금리.실업률.인플레율을 28년만의 최저수준■ 로 끌어내렸고 재정적자의 60% 축소,작은 정부,1천만명 이상의 신규고용창출을 이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소개한 일본 매스컴중엔 고(故)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전총리의 예를 들어 일본정치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한다.후쿠다는 「정책의 달인(達人)」이란 별명처럼 전후 일본의 가장 출중한 경제정책가로 평가받고 있다.그러나 그 에겐 「정책의 승자,정쟁의 패자」란 설명도 늘 따라다닌다.
「산이 높으면 계곡이 깊다」는 것이 경기순환에 관한 그의 지론이었다.산이 너무 높은 호황시에는 경기를 억제하고,계곡을 한시바삐 탈출해야 하는 불황시에는 적자국채발행을 피하지 않는 양칼잡이의 기수였다.
후쿠다와 정반대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전총리는 「정쟁의천재」로 일컬어졌다.후쿠다는 다나카와의 정쟁에서 늘 지는 편이었다.그런 다나카가 후쿠다에게 머리를 숙인 적이 있다.다나카의일본열도 개조붐과 석유위기의 상승작용으로 후쿠 다가 말한 「광란물가」가 극에 달했던 73년11월.다나카총리는 후쿠다에게 대장상을 맡아달라고 요구했다.누가 보더라도 위독상태의 일본경제 소생수술을 맡길 의사는 후쿠다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쿠다는 『초고속 성장을 불지른 일본열도 개조론을 당신이 철회하지 않는한 못 맡겠다』고 거절했다.다음날 다나카는 개조론 철회 선언으로 무조건 항복했다.후쿠다는 일본경제에 「전치3개년」의 진단을 내리고 총수요억제 정책을 밀어 붙여 1차 오일쇼크를 극복했다.
권력장악 하나에 목표를 맞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던 다나카에 비해 후쿠다는 상대적으로 권력의지가 약했다.어쩌면 다나카라고 하는 정쟁의 천재와 동시대에 있었던 것이 그에겐 불운이었는지 모른다.정치는 정책과 정쟁의 두 방향에서 이뤄 진다.정책이좋아도 정쟁에 지면 실현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그러나 후쿠다는 다나카의 금권 부패정치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비판했을 뿐 「정쟁도사」와 꼭같은 수법으로 응수하지 않았다.다나카가몰락한 후 그에게도 총리의 기회는 주어졌다.
최근 일본신문엔 「한국경제 악화일로」에 관한 기사와 金씨들및그 아류(亞流)들의 절도와 품위를 잃은 정쟁극이 앞다퉈 보도되고 있다.한국의 정치는 미국과 일본의 정책.정쟁다툼과는 차원이다른 「탈(脫)민생」의 독자노선(?)을 걷고 있는 것같다.
(일본총국장) 전육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