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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전문병원 늘리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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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어린이는 어른과는 다른 그들만의 특별한 욕구를 가진 독특한 개인이다. 특히 의료에 관한 한 어린이는 더욱 특별하다. '어린이는 작은 어른이 아니다(Children are not small adults)'라는 격언이 항상 소아의학 교과서의 머리말을 장식하는 이유다. 어린이에게는 성인과는 다른 그들만의 독특한 의학적 요구에 충실한 의료 서비스, 어린이의 체형과 심리에 적합한 크기와 모양의 시설과 장비, 그리고 치료환경이 필요하다.

더구나 어린이에 대한 보건의료 서비스는 성인 건강의 튼튼한 기초를 마련하고 장래의 장애 및 병을 예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면서도, 가장 비용 효과를 높일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하므로 사회.의료적 우선순위가 높은 분야다.

그러나 히포크라테스를 시조로 2300년의 역사를 가진 현대 서양의학은 기본적으로 어른을 주 대상으로 발전했다. 어른과는 다른 아픈 어린이의 '특별한 욕구'에 주목해 '특별한 병원시설'이 건립된 것은 1491년 독일에서다. 이어 영어권 국가에선 1852년 영국에서, 그리고 1885년 미국에서 '어린이 병원(children hospital)'이 건립됐다. 이후 어린이 보건의료 서비스의 특수성과 중요성에 관한 인식이 확산하면서 어린이 병원은 선진국의 거의 모든 주요 도시에 건립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경우 현재 250여개의 어린이 병원이 있으며, 일본에도 1965년 국립아동병원이 설립된 이후 2002년 확대 개편된 국립성육(成育)의료센터를 비롯한 27개의 어린이 전문 의료시설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소아외과.소아정형외과.소아신경과 등 각 전문 분야의 어린이 진료과를 설치하고 어린이의 특성 및 특별한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전문인력과 장비.시설.환경을 갖춘, 선진국에서 볼 수 있는 어린이 전문병원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일하게 서울대병원 부설 어린이 병원이 3차 의료 수준의 어린이 전문진료를 제공하고 있으나 선진국의 어린이 병원에 비하면 포괄성과 전문성.치료환경에 한계가 있고, 그나마 수용능력의 제약으로 그 수요를 다 충족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서울시가 설립한 서울시립아동병원의 경우 주로 소외계층 장애아를 대상으로 재활 위주의 진료를 하고 있을 뿐이다. 아동병원으로 불리고 있는 소수의 민간병원이 있으나 진정한 의미의 어린이 전문병원이라기보다는 전문화된 소아과 병원 정도로 평가된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모든 국민을 포괄하기 위한 의료보장 확대에 진력해 왔으며, 상당한 성공을 거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의료 서비스의 양적 확대에 만족할 시대는 지났다. 질적으로 향상된 의료 서비스를 모든 국민이 향유할 수 있는 선진적인 의료체계를 구축해 나가야 할 시점이다.

이러한 노력에 있어 어린이 의료의 질적 향상은 가장 중요한 과제다. 어린이는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우리 사회의 희망이며, 사회적으로 보호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계층이기 때문이다. 현 정부는 보건의료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강화하고 전체 보건의료체계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공공 보건의료 확충을 주요한 국정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공공 보건의료 확충에서 최우선적으로 고려할 수 있는 대안이 바로 어린이 의료시스템 구축과 어린이 전문병원 건립이다. 낮은 수익성으로 인해 민간부문에 의한 어린이 의료의 질 향상이 기대되기 어렵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복지 선진국으로의 도약과 저출산 시대에 대비하고, 어린이 보건복지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선 반드시 어린이 전문병원이 확충돼야 한다. 다른 선진국처럼 어린이를 중심에 두고 어린이의 건강증진과 치료를 위해 체계적이고 수준 높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어린이 의료시스템과 어린이 전문병원이 들어서고 지속적으로 확충될 때 비로소 국민도 우리나라가 선진국의 문턱에 들어서게 됐음을 피부로 느끼게 될 것이다. 정부의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다시 한번 촉구한다.

이기효 인제대 보건대학원 교수.병원전략경영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