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문회에 서는 그린스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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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년의 재임 기간 중 안정된 물가와 높은 성장률을 이끌어 ‘경제 대통령’으로 추앙받았던 앨런 그린스펀(사진)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미 의회 청문회에 선다. 금융위기와 관련한 그의 고견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번 금융위기에 그의 책임이 없는지를 규명하는 자리다. 청문회를 주관하는 곳도 그가 정기적으로 나와 금융시장과 경제에 대한 의견을 밝혔던 금융위원회가 아니라 정부 정책의 잘못을 가리는 미 하원 감독행정개혁위원회다.

위원장인 헨리 왁스먼(민주·캘리포니아주) 의원은 2일(현지시간) “금융위기와 관련해 무엇이 잘못됐고,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를 규명하는 것은 내년 1월 새 정부가 출범할 때까지 미룰 수 없다”며 “16일부터 세 건의 청문회를 열겠다”고 말했다. 그린스펀 전 의장은 23일 출석한다.

의원들은 2006년 1월 퇴임한 그린스펀 전 의장이 재임 중 실시했던 저금리 정책이 집값을 밀어 올리고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를 팽창시켰는지 추궁할 예정이다. 그린스펀 전 의장은 2003년 6월 연방기금금리를 연 1%로 낮추고 이를 1년간이나 유지해 집값 거품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셉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는 지난해부터 “그린스펀이 저지른 잘못으로 미국 경제가 위기에 직면했다”며 “그는 잘못된 시기에 돈을 너무 풀었고 사람들이 모기지 대출을 받도록 부추겼다”고 비판해 왔다.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도 이번 금융위기의 저변에 그린스펀 전 의장의 실책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린스펀 전 의장은 지금까지 자신의 잘못이나 실책을 인정한 적이 없다. 그는 스티글리츠의 비판에 대해 “연 1%의 저금리를 유지한 기간에도 시중 자금은 5% 정도 늘었을 뿐”이라며 “저금리 정책이 주택시장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또 그는 2일 워싱턴의 조지타운대에서 연설을 하고 현재의 상황을 신뢰의 위기로 진단했다. 그는 “지금의 위기는 금융회사들의 회계 기록과 자본금 수준을 믿지 못하는 데서 비롯됐다”며 “투자자들이 조심스럽게 시장으로 돌아오면 신뢰가 회복되고 경제도 되살아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청문회에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과 관련한 월가의 거물들이 대거 모습을 드러낸다. 16일엔 서브프라임 모기지 관련 파생금융상품에 과도한 투자를 한 것으로 지목받는 헤지펀드에 대한 청문회가 열린다. 증인으론 헤지펀드 업계의 큰손인 조지 소로스 소로스펀드매니지먼트 회장 등 다섯 명의 헤지펀드 책임자들이 채택됐다. 의원들은 헤지펀드가 금융시장 불안에 어떤 역할을 했으며 이들에 대한 규제가 얼마나 이뤄지고 있는지 따질 예정이다. 또 헤지펀드들이 세금은 제대로 내고 있는지도 추궁 대상이다.

17일엔 무디스의 레이먼드 맥대니얼 회장 등 세계 3대 신용평가사의 고위 경영진이 불려나온다. 금융회사들과 파생금융상품 등의 신용평가를 제대로 했는지가 도마에 오를 전망이다. 23일엔 존 스노 전 재무장관과 크리스토퍼 콕스 현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장이 그린스펀과 함께 출석한다.

김원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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