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 부자의 푸르른 동심 사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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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만 보면 마음이 환해져." 동심으로 돌아간 수필가 피천득옹(左)과 아들 수영씨가 동네 꼬마 류태우군을 안고 밝게 웃고 있다. [신동연 기자]

금아(琴兒) 피천득(皮千得). '오월'에서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고 노래하던 그는 올해 우리 나이로 아흔다섯.

교과서에 실려 있는 '큰 바위 얼굴'이나 '마지막 수업'이 그가 1940년대에 번역한 글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의 시집 '생명'(샘터)에는 "엄마! 나는 놀고 싶은데 무엇하러 어서 크라나"('아가의 슬픔') 등으로 표현된 동심이 가득하다. 그는 글에서 어린이를 늘 '어린 벗'이라고 부른다.

피수영(皮守英.60). 금아의 둘째아들로 국내 미숙아 치료 분야의 개척자다. 95년 미국 미네소타 의대 병원에서 서울아산병원으로 온 뒤 3000명 이상의 어린 생명을 구했다. 2000년 468g으로 태어난 아이를 살려내 최저체중아 치료 기록을 세웠다. 아버지는 어린이의 영혼을, 아들은 어린이의 몸을 살리고 키워온 것이다.

5일은 어린이날. 피천득.수영 부자의 마음도 함께 들떴다.

금아는 "아이들이 순진하고 정답게 크도록 실컷 놀게 둬야지. 영악하게 자라난 애들이 커서 다른 사람 속여가며 좋은 자리 차지하기밖에 더해"라고 말문을 열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너무 시달리고 있어. 우리 말과 글도 익히기 전에 영어를 배운다고 난리야. 나중에 실컷 배워도 되는데 부모 욕심만 앞세워 아이들을 괴롭혀." 그는 "애들이 책 안 읽고 컴퓨터 게임만 하고, 그 게임도 대부분 경쟁심만 키우는 거라서 큰일이야"라며 "아이들이 '마지막 수업'의 학생들처럼 나라를 사랑하고, '큰 바위 얼굴'의 인물같이 순박하게 자라났으면 좋겠어"라고 했다.

수영씨는 아버지와는 다른 걱정을 했다. "500g 이상으로만 태어나도 살릴 수 있고, 1.5㎏ 이상이면 95% 이상의 생존율을 보입니다. 부모가 먼저 포기하는 게 문제예요. 이항복.한명회.처칠 등 미숙아로 태어난 훌륭한 인물이 많은데 어른들은 일종의 장애로 생각하네요."

금아는 지난해 50여년 전 '소학생''어린이' 등의 잡지에 쓴 글을 엮어 '어린 벗에게'(여백)라는 책을 냈다. 아들은 '아주 작았던 아기들의 모임'을 이끌고 미숙아 치료 기금을 모으며 어린이 사랑의 대를 잇고 있다.

이상언 기자<joonny@joongang.co.kr>
사진=신동연 기자 <sdy1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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