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말랑말랑한 말들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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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기택(1957~) '말랑말랑한 말들을' 부분

돌 지난 딸아이가
요즘 열심히 말놀이 중이다
나는 귀에 달린 많은 손가락으로
그 연한 말을 만져본다
모음이 풍부한
자음이 조금만 섞여도 기우뚱거리는
말랑말랑한 말들을
(중략)
딸아이와 나의 대화는 막힘이 없다
말들은 아무런 뜻이 없어도
저 혼자 즐거워 웃고 춤추고 노래하고 뛰어논다
우리는 강아지나 새처럼
하루종일 짖고 지저귀기만 한다
짖음과 지저귐만으로도
너무 할 말이 많아 해 지는 줄 모르면서



아이들의 말은 묵은 가지에 새로 돋은 잎사귀처럼 연록빛이다. 어둡고 딱딱해진 귀를 활짝 열어 아이들의 말랑말랑한 소리를 만져본다. 애써 뜻을 만들지 않아도 무엇이든 빚을 수 있는 말. 두근두근 숨쉬고 있는 말. 최초의 말에 가장 가까운 말. 공처럼 통통 굴러다니는 말을 잡으려고 내 귓바퀴도 신나게 굴러다닌다. 그 말랑말랑한 말 속에서 종일 웃고 뛰놀고 싶다.

나희덕<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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