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재 기자의 웰컴 투 풋 볼 <55> 로이스터 매직과 허정무 축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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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검은 갈매기’가 ‘부산 갈매기’를 열창하는 순간 부산 사직구장은 환호와 감동으로 물결쳤다.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의 제리 로이스터 감독이 마이크를 잡자 3만 관중은 일제히 일어나 신문지를 흔들며 “부산 갈∼매기 부산 갈∼매기”를 목청껏 따라 불렀다. 로이스터는 ‘가을에도 야구하자’는 부산 시민의 소박하고도 절박한 꿈을 8년 만에 이뤄준 고마운 사람이다.

로이스터는 ‘꼴데(꼴찌 롯데)’를 어떻게 일으켜 세웠나. ‘신뢰와 책임’이 두 축이었다.

그동안 롯데는 결코 선수 수준이 떨어져 하위권을 맴돈 것이 아니었다. 올 시즌 펄펄 날고 있는 투수 장원준·강영식, 내야수 조성환, 외야수 김주찬 등은 ‘무명’이 아니라 ‘날개 꺾인 재능’들이었다. 이들은 만년 유망주 소리를 들으면서도 한번도 활짝 피어보지 못했다.

로이스터는 이들에게 칭찬으로 다가갔다. “너만 한 선수가 없다. 네 볼이 최고다”라며 끊임없이 격려했다. 선수들은 반신반의했다. ‘저러다가 조금만 잘못하면 쳐다보지도 않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로이스터는 한번 믿은 선수는 좀처럼 바꾸지 않았다. 실수하고 부진해도 계속 기용했다. ‘위대한 뱃살’ 이대호는 거포였지만 3루 수비가 불안했다. 로이스터는 그에게 “메이저리그에도 너 같은 빅맨이 많지만 너처럼 유연하고 3루 수비를 잘하는 선수는 없다”고 치켜세웠다.

칭찬과 신뢰를 먹은 선수들은 쑥쑥 자라났다. ‘감독이 믿어주니 더 잘해야겠다’는 책임감과 ‘더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솟아났다. 이들은 한결같이 “롯데 선수인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최고의 팬’에게 보답할 수 있는 ‘최고의 선수’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야구 얘기가 길었다. 축구로 돌아가 보자. 최근 베이징 올림픽 예선 탈락과 A대표팀의 무기력한 경기에 축구 팬은 크게 화가 났다. “대표팀이 전혀 대표팀답지 않다”는 말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이미 배가 부른 선수들은 태극 유니폼에 더 이상 감격하지 않는다. ‘더 좋은 길’로 가기 위한 발판 정도로 생각하는 선수가 많다.

이럴 때일수록 허정무 감독을 비롯한 대표팀 코칭스태프의 리더십이 중요하다. 일방적으로 선수들을 윽박질러서도, 특정 선수를 편애해서도 곤란하다. 말을 가려서 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모처럼 출전 기회를 잡은 골키퍼 김용대가 실책성 플레이를 하자 곧바로 “(음주 파동으로 징계 중인) 이운재 선수가 필요하다”고 말했던 허 감독이다. 이래서는 결코 선수의 신뢰와 복종을 이끌어낼 수 없다. 태극 유니폼을 입으면 눈빛이 빛나는 선수, 질 때 지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대표팀을 보고 싶다. 그런 팀을 만들 책임이 허 감독에게 있다.

정영재 축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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