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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 허점 파고든 지리산 남부 개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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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지리산의 남부 능선 자락. 경남 하동군 악양 들판은 푸릇한 청보리의 물결과 모내기를 기다리는 분홍빛 자운영 꽃밭이 한창이다. 그러나 이 평화로운 풍경 너머에는 산을 잘라 길을 내는 끔찍한 개발의 현장이 숨어 있다.

하동군 악양면 등촌리에서 청암면 묵계리까지 지리산 남부축을 자르는 관광도로 건설 사업이 한창이다. 1993년 군도 확장.포장 공사로 시작되어 2004년 현재 회남재 정상 코앞까지 진한 폭약냄새가 진동하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사업구간은 2.1㎞이고 공사비만 22억원을 넘는다. 전체 계획구간은 무려 16㎞나 되고, 그중 악양면 등촌리 구간 5㎞는 이미 포장되었다.

익히 보아 왔듯, 개발 세력들은 환경영향평가를 피하기 위해 구간을 교묘히 잘라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물론 사전 환경성 검토협의도 일절 없었다. 게다가 산림청마저 지방도로 포장공사에 따른 삼림 훼손이 불보듯 뻔한 이 구간에 산림형질변경 협의를 해주었다.

이뿐이랴. 악양~묵계 간 도로공사가 끝나는 지점에서 또다시 묵계치를 관통하는 도로 개발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97년 시작된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에서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 간 묵계치 관통 도로 공사가 이제 거의 완공 단계에 와있다.

우리의 상식상 분명 국립공원 측과 협의를 거쳐야 하는 사항임에도 불구하고 터널 진출입로가 국립공원 바깥에 있어 공원 측과 협의없이 공사하더라도 현행 자연공원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한다. 자연공원법의 허점을 파고든 것이다.

지금 경남도를 위시한 군 단위의 지자체에서는 지리산 남부권을 관통하는 관광도로 건설의 달콤한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동군 악양면 등촌리에서 회남재를 넘어 청암면 묵계리에 도로를 만든 뒤 다음달 완공될 묵계치 관통도로와 또다시 중산리까지 이어지는 임도를 확장.포장해 연결하는 꿈 말이다.

만일 이것이 현실화한다면 지리산국립공원 경계구역 내와, 이를 잇는 남부축과의 생태 단절을 각오해야 한다. 지리산국립공원 구역 밖인데 뭐가 문제가 되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비록 국립공원 구역 바깥이긴 하지만 무분별한 도로 건설로 지리산국립공원이 점점 생태섬으로 고립되어 야생동물의 서식처가 단편화되고 있다. 이는 곧 개체수 감소와 생물 다양성 저하로 직결되어 지리산국립공원의 생태계를 파괴할 것이 분명하다. 구례에서 남원 산내면을 오가는 성삼재 도로로 이미 가슴 한복판이 잘려버린 지리산이 다시 한번 회남재 도로의 건설로 양쪽 다리를 잃게 되는 셈이다.

환경부는 시행처에 면죄부만 준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환경영향평가와 관련된 법령을 이른 시일 내에 보완.개정하기 바란다. 또한 자연공원법도 개정해 국립공원만이라도 온전히 지켜낼 수 있는 실효성 있는 법을 만들기를 촉구한다. 지자체는 더 이상 개발만이 지역경제를 살리는 길이라는 낮은 수준의 인식을 버리고, 이제는 개발만이 아니라 자연생태를 잘 가꾸고 지켜내는 일이 훨씬 지역민과 지역경제를 살리는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윤정준 지리산생명연대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