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장관들, 대통령 메뉴 학습하느라 진짜 집중할 데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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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미국발 금융위기가 우리에겐 왠지 낯설지 않은 이유는 뭘까. 10년 전 IMF 외환위기와 지금의 글로벌 경제위기가 판박이처럼 닮았기 때문이다. 세계경제가 앞으로 겪을 고통과 시행착오를 우리는 10년 전에 이미 경험한 셈이다.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외환위기 극복을 책임졌던 민주당 강봉균 의원을 만나 그가 바라보는 현 위기상황에 대한 진단과 해법을 들어봤다. 다음은 중앙SUNDAY 전문.

무척이나 닮았다. 10년 전 한국의 외환위기와 지금 미국의 금융위기 말이다. 흥청망청 돈 잔치의 뒤끝이란 점도, 천문학적인 구제 비용이 투입된다는 점도 같다. 감독관 이름만 국제통화기금(IMF)에서 미국 정부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해법도 비슷할 게다. 외환위기 직후 청와대 정책기획수석과 경제수석을 맡아 ‘IMF 위기 탈출’을 책임졌던 민주당 강봉균(65) 의원을 24일 만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의 진단은 냉정했다.

-미국발 금융위기를 어떻게 보나.
“10년 넘게 쌓여 온 모순이 한꺼번에 폭발한 게 이번 사태의 본질이다. 이번 위기가 왜 발생했는지를 곰곰이 따져 보면 수습에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들 거란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12년 호황의 대가는 결코 만만찮을 것이다.”

-너무 비관적 전망이 아닌가.
“시장경제가 아무리 발전해도 경제의 본질인 상품·서비스의 생산과 공급이 뒷받침되지 않는 소득 증가는 거품일 뿐이다. 그런데 미국 경제는 이를 외면한 채 파생상품 등 머리 굴리기로만 돈을 벌었다. 그래서 더욱 수습이 간단치 않을 거다.”

-미국 정부가 700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 규모의 구제금융안까지 마련했는데.
“그 돈은 가시권에 들어온 부실채권을 사 주는 정도에 불과하다. 문제는 위기가 발생할 당시에는 멀쩡하던 기업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동반 부실의 늪에 빠져들게 된다는 점이다. 결국엔 지금보다 두 배 이상의 자금이 투입될 수밖에 없을 거다. 우리도 64조원이면 될 줄 알았는데 150조원이나 들지 않았나.”

-우리 경제는 상대적으로 영향이 적을 거라는 분석도 있다.
“미국 금융 부실과 직접 연관된 부분이 적고 파생상품도 덜 발달해 그나마 다행이지만 섣부른 낙관은 금물이다. 우리는 경제 규모에 비해 훨씬 개방된 나라다. 미국과 유럽 경제의 영향을 그대로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세계 경제가 다시 성장세로 돌아서는 데 최소한 2년은 걸린다고 보면 우리도 2년 정도는 꾹 참고 시스템 안정화에 주력해야 한다.”

그의 말은 신중했지만 분명했다. 10년 전 경험이 그에게 생생한 판단 근거를 제공하고 있는 듯했다. 당시 얘기를 좀 더 들어봤다.
 
부실 책임 제대로 묻는 게 관건
-10년 전 가장 힘들었던 점은 뭐였나.
“전 세계적으로 우리처럼 총체적인 경제 위기를 경험한 나라가 없었기 때문에 처방을 내리는 데 레퍼런스(참조할 만한 사례)가 없었다. 뭐든지 우리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야 했다.”

-주로 누구랑 상의했나.
“이규성 재경부 장관, 이헌재 금감위원장, 진념 기획예산위원장 등 네 명이 거의 매일 만났다. 기자들 접근이 안 되는 청와대 내부 회의실과 청와대 옆 안가 두 군데를 주로 활용했다. 무엇보다 IMF를 설득하는 게 발등의 불이었다. IMF는 고금리와 재정긴축 두 가지를 제시했는데, 일반적인 개도국 기준에 따른 것이어서 우리 현실과는 전혀 맞지 않는 처방이었다. 자금 경색에 고금리까지 겹치니까 중소기업이 자꾸 무너졌다. 또 민간 부문 수요가 움츠러드는데 정부 쪽까지 긴축하라는 건 실업을 방치하라는 말과 똑같았다. 끊임없이 얘기한 끝에 겨우 바로잡을 수 있었다.”

-예상보다 빨리 1년 반 만에 위기를 극복했는데, 어떤 전략이 주효했다고 보나.
“포인트는 이거다. 우리는 위기를 발생시킨 사람들에게 상당한 책임을 물었다. 금융기관에서 경영은 제대로 못 하면서 보수만 많이 받은 사람, 부실 대출에 연루됐던 사람에게 해직은 물론이고 손해배상 책임까지 물었다. 또 은행원의 거의 절반인 45%가 감축됐다. 미국 정부도 우리처럼 제대로 인력 구조조정을 할지가 관건이다. 7000억 달러나 투입되는데 책임을 제대로 묻지 않고 미국 국민이 골고루 비용과 고통을 나눠 지도록 하면 모럴 해저드만 커지고 후유증이 오래갈 것이다.”

-지나고 보니 아쉬웠던 점은 없나.
“실업대책을 세울 때나 경기 회복을 전망하는 데 너무 겁을 먹었던 것 같다. 잘 될까, 과연 효과가 날까…. 당시 대부분의 학자도 후유증을 털고 일어나는 데 짧게는 3년, 길게는 5년 걸린다고 했다. 솔직히 우리도 그렇게 빨리 회복될 줄 몰랐다. 힘들더라도 근본적 구조조정에 좀 더 많은 시간과 정력을 들여 자연스럽게 살아나게 해야 회복도 건강하게 된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하지만 그때는 그럴 여유가 전혀 없었다. 근본 치료에 좀 더 집중해야 했다는 아쉬움이 두고두고 남는다. 금융기관과 대기업 구조조정이 제대로 끝나지 않은 여파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지 않나.”
 
경제 관료들도 입 다물어
-이명박 정부의 대응은 어떻게 평가하나.
“굉장히 서두르고 있다. 7~8% 성장이란 대선 공약에만 집착하는데 ‘Forget!’이라고 외치고 싶다. 거기에 집착할수록 신뢰만 떨어진다. 지금 정부가 경기부양책을 써서 성장률을 높일 수 있는 한도가 1%를 넘지 않는다. 그만큼 시장경제에 좌우되는 시스템이 돼 버렸다.”

-부동산과 건설경기 활성화를 돌파구로 삼고 있는데.
“거래를 어렵게 하는 요소를 바로잡는 건 찬성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증시 전망이 안 좋으면 돈이 부동산 쪽에 집중돼 과열 양상을 띨 우려가 크다. 부동산 흐름은 큰 강물과 같아 물길을 바로잡는 데 최소한 1년은 걸린다. 잘못 건드리면 그렇잖아도 힘든 상황에 혹만 늘어날 뿐이다.”

-그린벨트 해제 논란도 뜨겁다.
“현 정부가 그린벨트까지 풀어 집을 지었는데 제대로 분양이 안 되면 그렇잖아도 어려운 건설업계가 회생 불능 상태에 빠질 우려가 크다. 그러면 이들 업체에 돈을 빌려준 금융기관까지 연쇄적으로 부실해질 수 있다. 지금 같은 경제위기 상황에서 건설경기 부양을 통해 과연 내수 진작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감세에 대한 견해는.
“내년에 경기가 위축돼 있는 상황에서 세율까지 낮추면 세금 걷기가 정말 어려워질 것이다. 재정적자를 감당하겠다면야 문제가 없지만 나의 오랜 경험으로 볼 때 국세청이란 막강한 기관이 나서서 기어이 목표를 달성하고 말 것이다. 가장 걱정되는 건 그 과정에서 이익도 못 낸 기업들이 국세청의 닦달에 못 이겨 없는 돈 끌어 모아 세금을 내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지 않나.
“금융위기가 발생한 바로 그 주에도 그린벨트를 푼다, 신성장 대책을 낸다 하며 떠들석한데, 문제는 지금 경제장관들이 대통령이 벌이는 메뉴를 학습하느라 진짜 집중해야 할 일에 집중을 못 한다는 데 있다. 경제부처 관료들을 한 번 만나 보라. 온통 혼이 다 빠져 있지 않은가. 국민이나 금융기관, 외국인투자자를 안심시키려면 대통령이 현 사태의 파장을 줄이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야 하는데 향후 10년치 주택 건설 목표나 얘기하고 있으니….”

-경제 관료들도 혼란스러워한다는 말인가.
“모두 입을 꼭 다물고 있다. ‘프리 디베이트(자유토론)’라는 경제부처의 오랜 전통이 사라져 버렸다. 청와대의 구호가 너무 거창한 게 문제다.”

이명박 정부에 대해 묻자 그의 말이 한층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감정은 끝까지 자제했다. “이건 여야 정쟁을 떠나 국가의 운명이 달린 문제”라고 했다. 그런 만큼 IMF 위기를 극복했던 노하우가 현 정부의 위기 대처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랐다. 이제 그의 10년 전 경험을 활용하는 것은 현 정부의 몫이다.

박신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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