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글씨는 보약을 먹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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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산(1928~88)은 문학평론가 구중서씨 표현에 따르면 ‘한국의 디오게네스’요, 신경림 시인 회고를 돌이키면 ‘거리의 스승’이다. 굳이 세상의 잣대로 가르자면 문필가이며 서예가였고, 그를 좀 아는 이들 사이에서는 철학자이자 전기연구가요, 바둑 애호가로 꼿꼿한 육십 평생을 보냈다. 30대 초반부터 ‘새벽’ ‘사상계’ ‘세대’ 등 여러 잡지와 일간지에 에세이와 칼럼을 발표한 그는 높은 식견이 바탕을 이루면서도 해학과 풍자가 넘치는 담백한 문장의 문필가로 독자를 울렸다.

88년 9월 환갑날 새벽에 그가 ‘기러기 훨훨 날아가듯’ 세상을 떠나고 나서 그를 흠모하고 따르던 지인과 후배들은 이렇게 기렸다. “세상을 사는 데는/ 그렇게 많은 지식이 필요 없는 법이라고/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 없는 법이라고/ 그렇게 많은 행동이 필요 없는 법이라고… 세상을 떠나서도 가진 것이 없을수록 좋더라면서/ 움직임이 적을수록 좋더라면서.”

선생은 생전에 자신이 쓴 글씨를 아는 이들에게 나눠 주길 좋아했다. 독학으로 서예를 공부한 뒤 이를 느꺼워해 날마다 즐겨 붓을 들었다. 그는 “왜 그리 평범한 한글 글귀를 쓰시느냐”는 질문에 “평범하고 쉬운 글이 좋은 것이야”라고 답했다. 그의 글씨가 미풍에 등잔불이 춤추는 것과 같다 하여 그의 호를 따 ‘청구자(靑丘子) 등잔불체’라고 부르는 이도 있다.

바둑을 좋아한 그가 남긴 “바둑은 길이 멀다. 그리고 길이 멀다는 게 바둑의 매력이다”와 “붓글씨는 보약을 먹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는 한 짝을 이루는 한마디다. 고인의 작고 20주기를 기리는 추모 글씨전 ‘민병산 선생님을 생각하며’가 30일까지 인사동 경인미술관(문의 010-4225-7807)에서 열리고 있다.

정재숙 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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