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관동 대지진 망령 살아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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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가지야마 세이로쿠(梶山靜六)일본 관방장관은 「정치판의 총감독」이라 불린다.그는 내각조사실이나 공안조사청등 일본의 주요 정보기관들이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郎)총리에게 민감한 사안을 보고할 때 반드시 배석하는 인물이다.
도쿄의 외국 특파원들 사이에서는 『일본의 깊은 흐름을 짚으려면 하시모토보다 가지야마의 움직임을 살펴야한다』는 것이 정설이다.그는 일본정계의 물밑 흐름을 깊이 대변하는 인물로 평가되고있다. 그런 가지야마장관이 8일 야마나시겐 후지요시다 시내에서열린 일본전국경영자총연맹(日經聯)주최 세미나에서 몇가지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그는 『한반도 유사시에는 대량의 위장난민이 (일본에)들어올 것이다.그들이 만약 무기를 갖고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또 일본국내에는 양국의 조직(민단과 조총련을 지칭)이 있다.그들이 내분에 휩싸일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문제를 던졌다.민단과 조총련은 「잠재적 적」으로 간주되며 시가전이나 게릴라전을 벌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뜻이다.
더 섬뜩한 발언이 이어졌다.
그는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한국과 북한이 )하나가 되고 미군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라며 『(한반도가 통일되면) 한국은 확실히 피폐해지고 식민지 시대의 배상을 다시 들고나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극언했다.달리 표현하면 그는 한반도가통일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있지도 않은,가능성도 없는 상황을 상정한 가지야마의 발언.
그의 황당한 궤변을 접하면서 1923년의 관동대지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때도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며 있지도 않은 상황을 조작해 수많은 인명을 학살했다.역사는 잘못된 상상이그렇게 엄청난 일을 저지를 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일본은 최근 종합병원선 건조를 검토하고 있다.한반도 유사시 자국민 대피를 위해 자위대 함정을 파견하기보다는 병원선을 파견하는 것이 한국의 정서를 자극하지 않을 것이란 이유에서다.또 일본은 어느 나라보다 먼저 한반도 4자회담을 지지 했고 지난해에는 상당량의 쌀을 북한에 지원했다.겉으로는 섬세한 부분까지 배려하고 남북 양쪽을 끔찍이 염려해주는 이웃나라다.
그러나 일본정계의 실력자 가지야마는 한반도 통일은 바람직하지않으며,일본에서 한민족이 시가전을 벌일 가능성이 있으니 여기에대비한 법률을 만들어야 한다는 극언을 하고 있다.
겉(다테마에)과 속(혼네)이 다른 일본.일본은 이웃으로 두기에는 참으로 끔찍한 나라다.
이철호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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