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직박구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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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고진하(1953~ )'직박구리' 전문

어떤 시인이
꽃과 나무들을 가꾸며 노니는 농원엘 갔었어요

때마침
천지를 환하게 물들이는 살구나무 꽃가지에
덩치 큰 직박구리 한 마리가 앉아
꽃 속의 꿀을 쪽쪽 빨아먹고 있었지요

곁에 있던 누군가 그걸 바라보다가
꽃가지를 짓누르며 꿀을 빨아먹는 새가 잔인해 보인다며
훠어이 훠어이 쫓아버렸어요

아니, 그렇다면
꿀이 흐르는 꽃가지에 앉은 생(生)이
꿀을 빨아먹지 않고 무얼 먹으란 말입니까



한 생물학자의 말을 빌리면, 꽃이란 다름 아닌 식물의 성기로서 그 속에 흐르는 꿀로 '날아다니는 음경'을 부른다고 할 수 있다. 그 자연스럽고도 은밀한 만남을 잔인하다고 쫓아버리는 생물은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 직박구리여, 네가 없이는 이 꽃이 다른 꽃에 갈 수 없으니 부디 맛있게 먹고 멀리 날아가다오. 내 안의 동물성이 직박구리에게 인사한다. 내 안의 식물성이 살구나무에게 인사한다.

나희덕<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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