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일의 영어 말하기 A to Z] 짧은 대화연습보다 스토리텔링이 더 중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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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얘기로 시작해보자. 어떤 경기를 보면 별다른 작전이 없는 팀이 있다. 그저 수비수들이 기습적으로 최전방 공격수에게 공을 뻥 찬다. 당연히 득점 성공률은 낮을 수밖에 없다. 좋은 감독이 이런 팀을 맡는다면 아마도 하프라인 근처에서부터 침착하게 공격의 실마리를 찾는 연습을 시킬 것이다.

그런데 이런 미더필더 없는 축구경기를 영어말하기 교육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초급 수준에서 어휘를 배우고 구문을 배운다. 중급 수준에서 문장을 잘 말할 뿐더러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러다 갑자기 CNN을 공부하고 영자신문을 읽는다. 최상급 수준의 토론과 논쟁 말하기 연습을 하는 것이다. 이건 자신의 수비 진영에서 공을 톡톡 차는 연습을 하다 갑자기 상대편 골문에 공을 뻥 차는 경우나 다름없다.

‘미더필드 영어’라고 이름을 붙여보자. 중급과 최상급 중간에 위치한 상급 수준 은 자신의 일상과 경험을 이야기 형식으로, 문단으로 전할 수 있는 능력이다. 사람과 상황을 자세히 묘사할 수 있고 과거의 사건을 서술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길게 말할 수 있는 지구력이 필요한 수준이다.

영어말하기 시험을 치르면 에피소드를 말하거나 나열된 그림을 보고 이야기로 전하는 문제가 자주 출제된다. 채점해 보면 우리나라 학생들이 유난히 이 부분에 약하다. 묵직한 주제에 대해 논쟁적인 의견을 내는 말하기 능력을 누구나 갖고 싶어 한다. 하지만 상급 수준에서 요구하는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야기 말하기)을 배우지 않고 토플시험이든 발표나 토론이든 최상급 수준에 오를 수 없다.

그런데 무모한 ‘뻥 차기 축구’와는 딴판으로 자신의 수비 진영에서 짧은 패스만 주고 받는 선수들도 있다. 공격은 하지 않고 패스 연습만 하는 듯한 팀도 참 답답하다. 영어말하기를 공부할 때 원어민 회화학원 다니고 묻는 말에 응답하면서 표현과 어휘 연습만 반복하는 것은 수비 진영에서 패스만 주고 받는 축구선수 꼴이다.

짧게 끊어치는 대화 연습은 그만하고 길게 자신의 이야기를 말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 연습을 해야 한다. 중급 수준이면 상급으로 진입할 준비를 해야 한다. 최상급으로 수준을 너무 앞지르는 것도 문제지만, 만년 중급 수준의 공부만 반복하는 것도 지루하다.

신동일 중앙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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