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선미의 창작동화] 뻔데기와 꼬마 자동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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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터덜터덜 걷던 동은이는 걸음을 멈추었어요. 길바닥에 쪼그려 앉아있는 상아 때문이에요. 꼬마 자동차를 아무렇게나 놓아두고 상아가 뭘 보고 있어요.

빨간색 경주용 자동차. 경주에 졌어도 화내지 말걸 그랬어요. 그랬으면 상아 자동차를 망가뜨리지 않았을 거고, 빨간 자동차를 빼앗기지도 않았을 텐데. 동은이는 발짝 소리를 내며 다가갔어요. 알아서 비켜 주기를 바라면서요. 그런데 상아가 손을 쫙 펴 보이며 말하는 거 있죠.

“조심해. 살금살금 걸어.”

동은이는 입을 삐죽 내밀고 발소리를 더 크게 냈어요. “위험하다니까! 저쪽으로 돌아서 가.” 상아가 손가락으로 자기 뒤쪽을 가리키며 명령했어요. 동은이는 몰래 한방 먹이는 시늉을 했어요. 여자애만 아니라면 진짜 그랬을 거예요. 상아가 보고 있는 건 번데기 같이 생긴 거였어요. “통통해. 속에 뭐가 들어 있을까?”“분명히 독이 들었을 거야.” 동은이는 퉁명스레 말했어요. 하지만 속으로는 ‘조금만 더 일찍 올걸. 그럼 번데기를 내가 차지하는 건데’하고 생각했지요. 동은이는 자동차와 번데기를 다 가진 상아가 못마땅했어요.

“만지면 큰일 날걸? 어떤 사람도 그런 거 만졌다가 큰일날뻔 했다더라.”

겁을 주었지만 소용없었어요. 상아가 번데기를 손바닥에 올려놓더니 보란 듯이 내밀었는걸요. “흥. 넌 겁나서 못 만지지?” “겁난다고?”동은이는 번데기를 낚아채려고 했어요. 그런데 상아 손을 탁 치고 말았어요. 그 바람에 번데기가 날아갔지 뭐예요. 고약한 할머니네 탱자나무 울타리로요. “야!”

상아가 울상을 짓더니 빨간 자동차를 집어 들었어요. “나한테 던지기만 해봐. 그럼 그건 다시 내 거야. ” 동은이도 물러서지 않고 노려보았어요. “이 못된 녀석아!” 상아가 자동차를 힘껏 던졌어요. 동은이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고요. 하지만 아무데도 아프지 않았어요. 자동차가 울타리에 처박히는 소리만 들렸지요. 동은이는 얼른 울타리 속을 보았어요. 빨간 자동차가 뾰족뾰족한 가시나무 속에 끼여버렸어요. “거기, 누구냐!” 울타리 너머에서 꽥 소리가 났어요. 고약한 할머니예요. 동은이와 상아는 냅다 도망쳤어요.

#둘

큰길에는 가로등이 있지만 고약한 할머니네로 가는 길은 깜깜했어요. 외진 곳이라서 그래요. 사람들이 낡은 집을 허물고 새로 지어도 고약한 할머니는 오래된 집에서 그냥 살아요. 텃밭도 있고 마당도 있는 집에서요. 동은이는 손전등을 비추며 걸었어요. 건전지가 닳았는지 불빛이 흐릿해요. 건전지를 아끼려고 불을 껐어요. “나는 안 무서워. 하나도.” 동은이는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불렀어요. 하지만 목소리가 금방 기어들어갔어요. 괜히 왔나 싶기도 했지요. 하지만 빨간 자동차는 생일날 받은 선물인걸요. 밤에 보니까 울타리가 마치 커다란 동물이 엎드려 있는 것처럼 보여요. 동은이는 울타리에 손전등을 비추었어요. 불빛이 흐릿해요. 아까보다 더한 것 같아요. 깜빡깜빡하더니 불이 꺼져버렸어요.

“아이 참! 이러면 안 되는데….”

동은이는 스위치를 꾹꾹 누르면서 눈을 갸름하게 떴어요. 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요. 맥이 빠져버렸어요.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왔는데 너무 억울해요. 자동차는 아직 새것인데. 쌔앵 달려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서 포기할 수가 없는걸요. 갑자기 울타리 속에서 반짝 빛이 났어요. 아주아주 작은 두 개의 불빛이에요. 동은이는 놀라서 물러났어요. 불빛과 함께 소리도 들렸어요.

“젠장, 너무 늦었단 말야.” 너무나 작은 소리예요. 속삭이는 것처럼. 다른 소리도 났어요.

“스톱, 스톱. 같이 가자고. 내 걸음으로는 나리 아기씨 탄생에 맞춰갈 수가 없단 말야!”

불빛이 조금 더 환해졌어요. 동은이는 눈을 갸름하게 뜨고 살펴보았어요. 고양이는 아니에요. 그럼요. 저렇게 쪼그마한 고양이 눈은 없다고요. 동은이는 눈을 깜박거렸어요. 맙소사! 자동차예요. 빨간 자동차가 양쪽에 불을 켠 채 움직이고 있는 거예요. 모자를 눌러쓴 운전사도 있어요. ‘세상에, 번데기잖아! 장난감 차에 운전하는 번데기라니….’번데기 옆자리로 달팽이가 기어오르고 있어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말예요. “서둘러. 갈 길이 멀다고.”
번데기가 재촉하자 달팽이는 안간힘을 다해 기어올랐어요. 자동차가 출발하자 달팽이가 차 안으로 굴러 떨어졌어요. 자동차는 탱자나무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기 시작했어요. 자동차 불빛이 비칠 때마다 울타리 속이 언뜻언뜻 보였어요. 마치 숲 속을 작게 만들어 놓은 것 같아요. 동은이는 뚫어져라 보았어요. 자동차가 울타리를 나가서 고약한 할머니네 뜰로 가는 것을. 더 자세히 보려는데 이마가 따끔했어요. 가시에 찔린 거예요.눈을 찡그리고 나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불빛도 소리도 다 없어진 거예요.

#셋

동은이는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들어갔어요. 고약한 할머니가 뭐라고 할지 겁이 나요. 하지만 궁금해서 한잠도 못 잔걸요. 어젯밤에 뭘 잘못 본 게 아닌지 꼭 와 보고 싶었다고요.

꽃에 물을 주던 할머니가 동은이를 물끄러미 보았어요. 동은이는 뒤에 감추었던 오이를 얼른 내밀었어요.

“엄마가 갖다 드리라고 했어요. 나리 아기가….”

“나리 아기?”

할머니가 동은이에게 다가왔어요. 그리고 빙그레 웃으며 오이를 받았어요. 소문처럼 고약한 것 같지는 않아요. 동은이는 재빨리 울타리 쪽을 살폈어요. 아, 있어요. 활짝 핀 주홍색 꽃 아래에 빨간 자동차가 있어요.

동은이는 얼른 가서 자동차를 집어 들었어요. 그런데 운전석에 번데기는 없었어요. 몸통이 갈라진 빈껍데기만 있는걸요.

“어제 그 친구는 안 왔니? 엄마한테 한번 놀러 오시라고 하려무나. 나리꽃이 핀 걸 어찌 아셨누.”

동은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주홍색 꽃을 보았어요. 꽃잎에 호랑나비가 앉아 있어요. 동은이에게,‘가까이 와 봐’하고 말을 걸듯이 날개를 가만가만 움직이면서 말예요

황선미=1963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95년 '구슬아 구슬아'로 아동문학평론 신인문학상 수상. '샘마을 몽당깨비' '초대받은 아이들' '나쁜 어린이표' '꼭 한가지 소원' '마당을 나온 암탉' 등이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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