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마음 담고 싶어, 꼭꼭 숨어 그림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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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작가 류재수(49·사진)씨를 만났다. 지난달 24일 서울 강남구 포이동 그의 작업실에서였다. 교회 건물 지하의 작업실에는 소년과 커다란 새, 그리고 바닷가 풍경이 담긴 큰 그림들이 벽과 바닥에 가득했다.

류씨는 “마무리 작업 중인 새 그림책 『돌이와 장수매』에 들어갈 그림들”이라고 설명했다. 몇 달 후 새 책을 낸다는 얘기였다. 작가가 책을 낸다는 게 그리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그의 경우에는 꽤 특별한 일이다.

설명을 하자면 이렇다. 류씨는 한국의 대표적 그림책 작가다. 인터넷 포털 ‘네이버’의 그에 대한 인물정보 첫 줄에는 ‘우리 나라 그림책의 길을 연 작가’라고 적혀있다.

하지만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그의 이름으로 검색해 보면 화면에 등장하는 책은 네권뿐이다. 그 가운데서도 널리 알려진 것은 『백두산 이야기』(통나무,1988)와 『노란 우산』(재미마주,2001) 정도다.『백두산 이야기』는 1991년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서 우수 도서로 선정된 이래 유네스코 주최 노마 국제 그림책 콩쿠르 은상, 한국 어린이 도서상 문화부장관상 등을 받았고, 『노란 우산』은 2002년 한국 책으론 처음으로 뉴욕 타임스가 선정하는 ‘올해의 우수 그림책’ 10권 가운데 한 권으로 뽑혔다.

이렇듯 ‘고품질 극소량 생산’을 하는 그가 새 책을 낸다는 것이다.

류씨는 “그림은 물론 계속 그렸고, 그림책 작업도 끊임없이 해왔다. 『노란 우산』은 86년에 구상했던 것을 다섯 번 다시 그렸고, 『백두산 이야기』후속편 격인 『돌이와 장수매』 이야기도 오랜 동안 구상했다”고 말했다. 나름대로 꾸준히 일해왔다는 얘기였다.

화제를 돌려,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그림책을 만드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내 책을 어린이들이 좋아하나요”라는 반문이 돌아왔고,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책이니까 그 많은 상을 받은 것 아니냐”고 다시 질문했다.

그는 “만약 어린이들이 내 책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내가 그들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려고 노력하기 때문일 거다. 늘 어른의 오만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사실 나는 그림책 보다는 어린이 교육 문제를 더 많이 고민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대학(홍익대 미대) 졸업 직후부터 빈민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고, 지금은 탈북 어린이의 교육 문제를 고민하고 사람들을 돕고 있다. 『돌이와 장수매』는 한 탈북자 어린이를 자주 만나다가 가족을 그리워하는 그를 위로하기 위해 세상에 내놓는 책이다.”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출판사들이 앞다퉈 외국 그림책을 번역 출판하는 바람에 좋은 그림책이 많이 나와 있다. 하지만 출판사들이 번역에 치우치면서 정말 어린이들에게 좋은 책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그런 책을 만드는 일에는 소홀한 것 같다. 지나치게 상업주의적인 모습을 보일 때도 많고….”

류씨는 “『돌이와 장수매』를 딱 다섯 권만 만들어서 그 탈북자 어린이와 나, 그리고 가까운 사람만 나눠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고 말했다. 자신의 책도 그 상업주의에 편승할 것이 두렵다는 것이다. 그의 철저한 자기 검열과 정성이 고품질 책 생산의 비결이었다.

“교사 월급으로 내 작업을 후원하고 있는 아내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죄 짓고 살지 말자고 늘 다짐한다”는 류씨는 “2년 전부터 바깥 세상과 거리를 두고 작업에 전념하고 있어 앞으로는 좀 속도가 붙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속도’가 어느 정도일지는 모르겠지만, 명작 그림책들이 잇따라 나오기를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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