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스토리] “배울 거 많은 이솝은 어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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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부 임주형씨(중)가 딸 채은이와 아들 효중이가 고른 책을 살펴보고 있다. 효중이는 공룡·고래등 몸집이 큰 동물에 대한 책을, 채은이는 왕자·마녀가 등장하는 책을 좋아했다. [사진=변선구 기자]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지난달 27일 저녁 서울 중계동의 어린이 책 전문 서점 ‘이솝’. 30여 평 규모에 수천권의 책이 어린이들의 손이 닿을 수 있는 나지막한 책꽂이와 진열대를 장식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자녀와 함께 책을 고르고 있던 임주형(35·서울 중계동·주부)씨에게 실험에 동참해 줄 것을 부탁하자 흔쾌히 수락했다.
요령은 간단했다. 임씨의 남매 장채은(9·을지초 2년)과 장효중(8·을지초 1년)이 각각 그 책방에서 읽고 싶은 책 10권씩을 고르고, 동시에 임씨가 두 아이가 읽기를 바라는 책 10권씩을 고르는 것이었다. 만화책·그림책·영어책·만들기책 등 책의 종류에는 제한이 없었다.

효중이는 10분도 채 안돼 열권을 골랐다. 그 만큼 기호가 뚜렷하다는 의미일까.

효중이가 고른 책은 『세계의 동식물』(주니어김영사),『사라진 공룡의 세계』(크레용 하우스),『사라진 지구의 지배자 공룡』(시공주니어),『세상 구경 시켜 줄 고래를 찾습니다』(반딧불이),『펭귄 토비아 아프리카에 가다』(아이터),『거인 사냥꾼을 조심하세요』(시공주니어),『고대 그리스 어린이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주니어김영사),『즐거운 이사 놀이』(비룡소),『인디언 붓꽃의 전설』(물구나무),『마법천자문 2』(아울북)였다.

열권 가운데 다섯권이 동물에 관한 것이었다. 임씨는 “효중이는 고래·공룡 등 커다란 동물에 대한 책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효중이는 『거인 사냥꾼…』에 대해 “원래 이야기를 알고 있어서 골랐다”고 했다. “누군가가 책을 읽어준 적이 있는데 아이가 직접 읽고 싶었다는 뜻일 것”이라고 정태선(총제적 언어교육 연구소장)씨가 설명했다. 정씨는 “어른들은 알고 있는 얘기에 대한 책을 지루해 하지만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는 얘기에 대한 책도 좋아한다”고 덧붙였다.

효중이에게 “『마법천자문』 좋아해?”라고 묻자 “재미있어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천자문을 소재로 삼은 학습 만화책인 『마법천자문』은 현재 4권까지 나와있으며, 30만부 이상 팔렸다. “만화책 좋아해?”라고 재차 묻자 “네 좋아해요. 그런데 엄마는 만화책 보는 거 안 좋아해요”라고 말했다. 열권 중 만화책이 한권밖에 없는 것은 평소 어머니의 ‘교육’ 때문인 듯했다.
얼마 뒤 채은이도 열권을 골랐다.

『베니스의 왕자』(베틀·북),『키라쿠와 마녀』(문학동네 어린이),『신비한 불가사의 이야기』(랜덤하우스중앙),『한 걸음씩 배우는 돈 이야기』(배동바지),『교과서와 함께 읽는 우리 신라사 2』(주니어김영사), 『드룬의 비밀』시리즈(문학수첩) 1·9·10·12·13권이었다.

왕자·마녀 등이 등장하는 신비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취향이 확연히 드러났다. 동생처럼 만화책은 『…신라사 2』 한권만 골랐다. 역시 만화책은 어쩌다가 한권만 읽는다는 어머니와의 약속이 있었던 듯했다.

팬터지 동화 『드룬의 비밀』을 순서를 건너가며 고른 게 특이해 물으니 “제목을 보니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 나중에 다시 순서대로 보면 돼요”라고 답했다. 정씨는 “시리즈물을 순서대로 보지 않고, 우선 눈길 끄는 부분부터 보고 다시 전체적으로 읽는 어린이들이 꽤 있다. 어른이 꼭 순서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얼마 뒤 임씨가 책 스무권을 힘겹게 들고 나타났다. 두 아이에게 각각 권해주고 싶은 열권씩이었다.

효중이에 대한 것은 『꼬마 미술가, 고흐』(베틀·북), 『치타의 공격에서 지켜 낸 생명』(바다 어린이),『뿌리』(베틀·북),『야, 미역 좀 봐』(보리),『내가 도와줄게』(비룡소),『낭송 동시집』(파랑새 어린이),『라퐁텐 우화집』(크레용하우스),『이솝이야기 2』(계림),『행복한 왕자』(마루벌),『해와 달이 된 오누이』(보림)였다.

제목만 봐도 ‘교육’과 ‘교훈’의 분위기가 확 풍겼다. 임씨는 한권 한권 선정 이유를 설명했다. “『꼬마 미술가 …』는 미술에 대한 관심을 위해 … 『뿌리』는 과학에 대한 쉬운 이해를 위해서 … 『내가 도와줄게』는 인성 교육을 다룬 책이라서 … 『라퐁텐 우화집』은 권선징악의 교훈이 담겨서 … 『야, 미역 좀 봐』는 흔히 접하지 못하는 바닷가 풍경을 보여줄 수 있어서 … 『낭송 동시집』은 동시를 좀 읽히려고 ….”

임씨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린이 책에 관심이 많으신가봐요. 애들도 책을 많이 읽었죠?” 어린이 전문 서점을 찾는다는 것만 봐도 어머니와 아이들이 보통 수준 이상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는 있기는 했다.

“애들이 책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책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에요. 다른 애들 읽는 정도일 거예요.” 임씨는 아이들과 함께 책 읽기를 즐기기는 하지만 다른 어머니와 크게 다른 수준은 아니라고 말했다. 정씨는 “교육의 흐름이 바뀌면서 어린이 독서에 관심을 기울이는 부모가 많다”고 말했다.

다시 임씨가 채은이를 생각하고 뽑아온 열권을 들여다봤다.

『놀라운 사람의 몸』(계림),『직업의 세계』(길벗 어린이),『지구가 100명의 마을이라면』(푸른숲),『생명의 역사』(시공주니어),『세상을 바꾼 삐딱이들 2-코코 샤넬』(세이북스),『지구를 살려라』(시공주니어),『두꺼비 신랑』(보리),『생각』(논장),『똥떡』(언어세상),『꽃의 전설』(어린이 작가정신)이 가지런히 모여있었다.

몸·직업·생명·환경 등에 대한 교육적인 내용이 주류를 이뤘다. 자녀가 세상의 이치와 자신의 관심분야를 빨리 깨닫기를 원하는 부모의 마음이 드러났다. 스무 권 가운데 창작동화나 만화책은 한권도 없었다. 두 아이가 고른 책과 일치하는 책도 전혀 없었다.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책과 부모가 읽히고 싶어하는 책은 역시 달랐다.

이상언 기자 <joonny@joongang.co.kr>
사진=변선구 기자 <sunni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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