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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소송제 적극 검토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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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정보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기술 수준이 낮았을 때는 대의민주제가 현실적인 차선책이었다. 국가의 규모가 커지면서 직접민주주의는 채택할 수 있는 제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방자치제 역시 국가의 규모가 정치에 미치는 영향을 극복하기 위한 제도적 대응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대의민주제와 지방자치제는 관료와 정치인과 같은 대리인이 꼭 필요하다. 그리고 이들의 능력과 성실성이 제도의 성패를 좌우한다. 이들을 공익을 추구하는 공인(公人)이라고 전제했던 것도 성공적인 제도 운영의 필수조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인들은 지극히 당연하게 사익도 추구하기 때문에 정부 조직과 예산이 팽창하고 납세자들은 과중한 조세를 부담할 수밖에 없다. 고비용 정치제도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만은 이미 오래 전에 공공부문의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정치인과 관료들이 사익 추구를 넘어 부정과 부패를 저지른 것은 개혁의 불길에 부어진 휘발유였다.

따지고 보면 정치인과 관료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권한을 위임하면서 이들에 대한 충분한 견제장치가 마련되지 않았고, 이들의 신분과 업무에 독점적 지위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공부문의 개혁 방안은 대리인들의 권한을 회수하고, 이들이 신분과 업무에서 누리는 독점적 지위를 해체해 경쟁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어 영국의 강제경쟁입찰제도를 보면 공무원들이 업무에서 누리던 독점적 지위를 해체, 민간도 참여하도록 해 경쟁을 확대.강화했다. 또 상당수 선진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개방형 직위제를 보더라도 공직자들의 신분상 독점을 일부라도 완화해 경쟁을 강화하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직접민주제적 요소도 강화하고 있다. 스위스의 캔톤에서는 100만 스위스프랑 이상의 예산이 필요한 정책은 주민의 동의를 얻게 하고 있다. 이 주민투표제는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게 해 대리인의 권한을 제한한 것이고, 주민소환 역시 공직자들에 대한 주민들의 직접 통제를 확대한 것이다.

주민소송제도 이와 맥을 같이하는 강력한 개혁 방안이다. 자치단체가 예산을 낭비할 때 일정 수 이상의 주민들이 단체장이나 담당 공무원에게 소송을 제기해 예산을 반환하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직자들이 법을 어기지 않는 한 처벌받지 않는 신분상 특권을 제한한 것이다. 이렇듯 강력한 제도는 부작용 또한 크다. 특정 목표를 가진 집단이나 잘 조직된 이익집단이 소송제를 단체장을 부당하게 견제하고 행정의 발목을 잡는 수단으로 악용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민소송제의 도입은 시대적 조류다. 미국은 1863년 이미 연방부정청구법(The Federal False Claims Act)을 도입했고, 일본을 비롯한 선진국들도 주민소송제를 도입했다. 이뿐 아니라 지방의회 의원들과 공무원들의 관광성 해외 나들이, 재정자립도는 20%에 불과한 자치단체가 호화스러운 청사를 건립하는 일, 단체장의 얼굴을 알리기 위한 선심성 행사 등 자치단체장들의 방만한 예산 운용 행태를 보면 이를 견제할 장치가 필요하다는 점을 확신하게 된다. 더욱이 단체장은 감사원 감사 대상에서도 제외돼 있으며, 지방의회와 단체장이 같은 당 출신인 경우가 많으며, 동조화가 이뤄져 엄격한 견제가 어렵다. 주민소송제를 도입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다만 주민소송제가 남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주민 감사 전치주의를 채택하고, 소송 대상을 명백하게 지정하며, 소송에 필요한 적정 인원수를 합리적으로 설정해야 한다. 아울러 주민투표제.주민소환제 등의 제도와 조화로운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18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인류는 자유.평등.복지라는 세 가지 위대한 이념을 진화시켜왔다. 대의민주제는 그 진화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대리인의 손에 성패가 달린 이 제도로는 더 이상 진화를 이끌어갈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정치의 제도와 운영을 혁신하고, 직접 참여를 강화해 이 이념들을 보다 높은 수준에서 구현해야 할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정정목 청주대 교수.행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