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화엄경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이면우(1951~) '화엄경배' 전문

보일러 새벽 가동중 화염 투시구로 연소실을 본다
고맙다 저 불길, 참 오래 날 먹여 살렸다
밥, 돼지고기, 공납금이 다 저기서 나왔다
녹차의 쓸쓸함도 따라나왔다
내 가족의 웃음, 눈물이 저 불길 속에 함께 타올랐다

불길 속에서 마술처럼 음식을 끄집어내는 여자를 경배하듯
나는 불길에게 일찍 붉은 마음을 들어 바쳤다
불길과 여자는 함께 뜨겁고 서늘하다 나는 나지막이
말을 건넨다
그래, 지금처럼 나와 가족을 지켜다오
때가 되면 육신을 들어 네게 바치겠다.



보일러 투시구 속의 불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심지에서 가장 가까운 쪽은 붉고 가장 먼 쪽은 푸르다. 마치 우리의 삶에 눈물과 웃음, 뜨거움과 서늘함이 공존하듯. 보일러공인 시인은 그 불길의 신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리라. 불을 향해 정직한 땀과 붉은 마음을 들어 바친 자만이 화염(火焰) 속에서 화엄(華嚴)을 볼 수 있는 법이니까.

나희덕<시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