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집권 꿈꾸는 민노당이라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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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7대 총선 이후 단연 세인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정당은 민주노동당이다. 노동자와 서민의 대표임을 자임하는 민주노동당은 이번 선거에서 10석을 얻어 일약 제3당으로 부상했다. 계급정당이 드디어 제도권에 진입한 것이다. 민노당의 등장으로 우리 정치는 이념적으로 오랫동안 비어 있던 절반을 채우게 됐다.

*** 정책보다 판갈이에 공감한 듯

그런데 민노당의 약진에 주목하게 되는 또 다른 이유는 민노당이 정당투표에서 지역적으로 큰 편차없이 전국적으로 10% 이상의 고른 지지를 얻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열린우리당조차 지역구에서 제대로 당선자를 내지 못하는 부촌이라는 서울 강남권에서도 적지 않은 유권자들이 민노당에 표를 던졌다. 보수적이고 한나라당 지지층이 몰려 산다는 이들 지역에서 민노당은 서초구에서 9.2%, 강남구에서 9.1%, 송파구에서 11%의 정당 득표를 했다. 이러한 비율은 민노당의 전국 평균 정당투표 득표율인 13%에 비해서는 다소 낮은 것이지만 이들 지역에서도 상당한 수의 유권자가 민노당에 표를 던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결과는 매우 흥미롭다. 민노당이 내건 구호나 공약이 실제 정책으로 입법화된다면 직접적인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이들이 민노당을 지지한 것이기 때문이다. 민노당은 실제로 '부자에겐 세금을, 서민에겐 복지를'이라는 구호를 이번 총선에서 내걸었고 부유세 도입도 약속했다.

이처럼 민노당 정책대로라면 세금을 더욱 많이 내야 하는 사람들이 민노당에 투표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번 선거에서 민노당에 대한 지지가 반드시 당의 정책 공약에 대한 매력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실제로 민노당에 투표한 유권자 가운데는 고학력 화이트칼라, 그리고 중산층 이상의 유권자들이 많았다. 이러한 유권자들이 민노당을 지지한 까닭은 기존 정당 체제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고 정치권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기 위한 의도 때문이었다는 해석이 보다 적절해 보인다. 다시 말해 '50년 동안 구워먹어 새까맣게 된 고기판을 갈아야 한다'는 데는 공감하지만 그 뒤 어떤 고기를 그 판에 올려놓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각기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민노당 지지의 이러한 특성은 독일 녹색당의 출현을 연상시킨다. 녹색당은 환경운동에서 출발했고, 1983년 선거에서 기존 정당 체제에 대한 불만을 갖는 유권자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면서 처음으로 연방의회에 진출했다. 녹색당은 의회 진출 이후 정치권에 여러 가지 신선한 바람을 불러 일으켰지만, 환경운동단체로부터 제도권 정당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당의 정체성을 둘러싼 당내 갈등의 격화로 91년 선거에서는 의석을 얻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독일 녹색당의 이러한 경험은 민노당에도 시사하는 바 크다. 민노당이 지향하는 노동자.서민을 위한 정책 구현이라는 이념적 목표와 민노당에 표를 던진 유권자의 계급적 기반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은 향후 민노당 역시 당의 노선을 둘러싼 정체성의 혼란이나 갈등을 겪게 될 수도 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던 어려웠던 시절부터 당을 지키고 이끌어 온 당원들로서는 당의 정체성과 이념적 순수성이 민노당이 지켜야 할 가장 소중한 자산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순수한 이념 노선의 강조는 당의 지지기반 확대에는 저해요소가 될 수 있다. 민노당에 관심을 갖는 일반 유권자들은 핵심 당원들처럼 동질적이지도 않고 순수 이념만을 지향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 정체성 둘러싼 갈등 극복해야

그런 점에서 볼 때 민노당은 이제부터 과거의 노동운동 단체로부터 집권을 도모하는 정당으로 변신하는 실질적인 과정에 들어선 셈이다. 현실 정치에 들어선 이상 당세를 확장하기 위한 이념의 '물타기'는 불가피해 보인다. 문제는 이상과 현실이라는 두 가지 상반되는 가치를 둘러싼 당 내부의 갈등을 어떻게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2008년 제1당, 2012년 집권당이라는 당찬 목표를 설정한 민주노동당의 향후 행보가 더욱 궁금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강원택 숭실대 교수.정치외교학